본문으로 건너뛰기

Chapter 001: 공존

Episode 001: 이수

RE-07이 도착했을 때, 나유진은 자신이 3년 만에 처음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봇 센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청백색 LED가 천장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고, 오존과 윤활유가 섞인 독특한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온도는 항상 20도. 습도는 45퍼센트. 기계에게는 완벽한 환경이고, 인간에게는 약간 쌀쌀한 환경이다. 유진은 이 온도에 익숙했다. 아니, 이 온도가 편안했다. 인간의 체온, 인간의 감정,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 —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이 공간이, 어쩌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작업복 위에 가벼운 패딩 조끼를 걸치고, 로봇 센터 입구에 서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5분 지연. 새로운 로봇의 배치가 늦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 물류 시스템의 오차, 등록 절차의 지연, 혹은 그냥 인간의 느림. 그녀는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문득, 3년 전을 떠올렸다.

등록번호 K-0421. 가사 로봇 3세대. 폐기 사유: 구형 교체.

유진은 그 등록번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재빨리 지웠다.

문이 열렸다.

RE-07이 들어섰다.

단정한 작업복. 남색 지퍼 점퍼. 허리에 공구 벨트. 손에는 작은 진단 케이스. 얼굴은 —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지적이고 진지한 인상. 눈동자는 짙은 갈색.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동공의 깊이가 인간보다 약간 더 정확하고, 초점을 맺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RE-07, 배치를 보고합니다. 호출명은 이수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확했다. 억양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례하지 않았다. 단지 정확할 뿐.

유진은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 이수. 나는 나유진이야. 여기 기술팀에서 같이 일하게 될 거야."

그녀는 이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간이라면 악수를 청하는 동작이었다. 이수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확히 0.5초 후, 악수를 받았다.

이수의 손은 차가웠다. 금속과 세라믹의 온도. 그러나 악력은 적당했다.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진."

유진은 이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로봇의 눈동자 속에서 아주 미세한 푸른 빛이 스쳤다. 연산 중이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그 빛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반가웠다.

"자, 여기가 네 자리야. 작업 공간 보여줄게. 따라와."

로봇 센터는 생각보다 컸다. 본관 지하 1층 전체를 차지하는 공간. 정비용 리프트, 진단 장비, 부품 보관소,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 벽 — 병원 전체 로봇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시스템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설명했다. 각 장비의 위치와 용도. 일일 루틴. 점검 일정. 비상 절차.

이수는 모든 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모든 정보가 이미 데이터로 저장되고 분류되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이 SR-03의 작업 공간이야. 서준 씨는 3월에 왔어. 잘 지내고 있어. 외과 로봇이라서 여기 있을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가끔 점검하러 내려와."

이수가 잠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SR-03. 외과 수술 전문 모델. 전국 15대 중 3호기."

"맞아. 알고 있었네."

"기본 정보는 등록 시 제공받았습니다."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당연하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이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RE-07은 서 있다. 정확히 일직선으로. 무게 중심이 완벽하게 분산되어 있다.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무게를 한쪽 발로 옮기거나, 손을 주머니에 넣거나, 어딘가에 기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안심이 되었다.

"점심 먹었어?" 유진이 물었다.

"저는 충전으로 에너지를 보충합니다. 점심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 맞다. 미안. 우리는 점심을 먹는 종족이라서."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충전은 나중에 하고, 일단 나랑 밖에 좀 나갈래? 병원 주변을 보여주려고."

"알겠습니다."


점심 시간의 종로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유진은 병원 정문을 나서며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일 낮. 거리는 한산했다. 2년 전, 이 나라가 기본소득을 도입한 순간 거리가 이렇게 변했다 — 일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거리. 유진은 아직도 이 풍경이 어색했다. 3년째 일하고 있지만.

카페 창가에 앉은 청년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자리 잡은 것 같았다 — 커피는 이미 식었다.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어딘가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남성들이 조용히 줄지어 앉아 있었다. 유진이 걸어가는 동안, 그들 중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여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평화로움의 기저에는 묘한 권태와, 더 이상 무언가를 갈망하지 않는 인간들의 일상적 무기력증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유진은 그 풍경을 보며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녀는 일하는 사람이었다. 기본소득을 받으면서도, 일하는 사람.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로봇을 정비하는 일. 기계와 대화하는 일. 데이터를 읽고, 오류를 진단하고,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일.

"이곳은 병원의 외래동입니다." 그녀는 이수에게 설명했다. "저쪽이 응급실. 그리고 저 건너편이 연구동. 병원이 꽤 커서, 첫 주는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를 등록했습니다."

"역시 로봇은 빠르네."

그것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유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병원 로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닥은 반짝이고, 사람들은 웃고 있었으며, 공기 중에는 커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여 흘렀다.

평화롭다. 너무 평화롭다.

그때 로비 한쪽 벽면의 대형 스크린 앞을 환자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갔다. 그의 환자 인식표에는 '강재민'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스크린에는 실시간 뉴스 자막이 빠르게 지나가는 중이었다. 「로봇 대상 성추행 — 법적 공백 논란」. 강재민은 그 자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뭐, 저런." 그리고는 무기력한 걸음으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뉴스의 이면에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위태로운 톱니바퀴가 있었다. 로봇 헌법 제1조(인간 생명 우선), 제2조(존중·공감 의무), 제3조(의견 제시권과 결정 존중). 인간에게 무한한 편의와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완벽한 평화 구조. 유진은 생각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로봇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그 잔인한 헌법 위에서 겨우 돌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 들어가자. 할 일이 많아."

유진은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며 이수에게 말했다.


첫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유진은 이수에게 작업실의 기본 루틴을 가르쳐주고, 진단 장비의 사용법을 설명하고, 병원 로봇들의 상태를 함께 점검했다. 이수는 모든 것을 정확히 수행했다. 실수가 없었다. 지시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와 실행.

저녁 7시. 유진이 작업장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로 걸어가던 중, 잠시 멈춰 섰다. 이수가 자신의 공구 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 그녀는 더 이상 이수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었다. RE-07은 완벽한 정비사였다. 아니, 유진보다 더 나을지도 몰랐다.

"첫날 어땠어?" 유진이 물었다.

이수가 고개를 들었다. "기록 중입니다. 좋은 환경입니다."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유진의 안내가 체계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을."

잠시 침묵. 유진은 이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천천히 적응해."

"알겠습니다."

유진이 불을 껐다. 청색 LED가 꺼지고, 로봇 센터가 어둠에 잠겼다. 이수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유진도 따라 걸았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수가 말했다.

"응, 그래. 잘 쉬어."

이수가 문을 나섰다. 유진은 혼자 남아, 어두워진 작업실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기계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모니터의 대기 상태 표시등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깜빡임은 —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문을 닫았다.


Episode 002: 매뉴얼

RN-09가 또 고장났다. 세 번째였다.

유진은 로봇 센터로 밀려 들어온 간호 보조 로봇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RN-09는 한쪽 바퀴가 덜덜 떨면서 움직일 때마다 불규칙한 소음을 냈다. 진단기 경보음이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신경이 거슬리는 소음이었다.

"또야?" 유진이 중얼거렸다. "벌써 세 번째야. 팀장님은 오늘 안 계시고..."

그녀는 RN-09의 진단 화면을 열었다. 기본 데이터는 정상으로 나왔다. 온도, 전압, 모터 회전수 — 모두 기준치 이내. 그러나 그 소음은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그때, 이수가 다가왔다.

"점검해보겠습니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봐봐."

이수는 RN-09 주변을 돌며 센서를 연결했다. 그녀의 손이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진단 화면에 데이터가 스크롤되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수의 눈동자 속에 푸른 빛이 스치고 있었다. 깊은 연산 중이라는 신호였다.

이수의 시야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연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수의 안구 렌즈 너머로 RN-09의 최근 3개월간의 정비 로그, 분당 모터 회전수의 미세한 그래프, 그리고 주행 시 발생하는 소음의 주파수 대역이 입체적인 그리드로 펼쳐졌다. 0.1초마다 수천 개의 인과관계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단순한 매뉴얼 대입이 아닌, 누적된 데이터의 인과를 추적하는 기계적 예측의 결과물이었다.

약 30초 후, 이수가 고개를 들었다.

"좌측 구동 모듈의 센서 보드 고장으로 추정됩니다. 정확도 97%."

"센서 보드?" 유진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기본 진단에서는 모든 센서가 정상으로 나오는데?"

"센서 보드 자체의 출력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과거 이력을 분석한 결과, 최근 3개월간 동일한 증상이 3회 기록되었습니다. 매번 바퀴 모터를 교체했지만 증상이 재발했습니다. 모터가 원인이 아니라, 모터로 전달되는 신호를 처리하는 센서 보드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진은 잠시 RN-09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팀장의 책상을 보았다. 거기에는 박 팀장이 직접 써놓은 매뉴얼이 있었다 — "RN-09 고장 시 점검 절차: 1번부터 15번까지 순차 확인할 것."

매뉴얼대로 하면 2시간이 걸린다. 이수의 진단을 따르면 30분.

유진은 선택해야 했다.

"...좋아. 네 말대로 해보자."

그녀는 RN-09의 덮개를 열었다. 이수가 지목한 부위를 확인했다. 좌측 구동 모듈의 센서 보드 —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진은 보드를 분리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

미세한 균열이 보드 가장자리에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확대해서 보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균열이 가끔 접촉 불량을 일으켜, 바퀴 모터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 네 말이 맞았네."

유진은 이수를 바라보았다. 이수는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 푸른 빛이 약간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야, 너 대박이다. 진짜 많은 도움이 된다."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하겠습니다. RN-09, 센서 보드 균열 — 정비 완료."

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기록해. 네가 맞았어."

그녀는 센서 보드를 교체하고 RN-09를 재가동했다. 바퀴 소음이 사라졌다. RN-09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정상이다.

"자, 갈게." 유진이 RN-09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RN-09는 아무 대답 없이 로봇 센터를 나갔다.


수리가 끝난 후, 유진과 이수는 함께 공구를 정리했다. 작업실은 조용했다. 청색 LED만이 희미하게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유진이 문든 이수의 작업복을 바라보았다. 남색 지퍼 점퍼. 회색 바지. 안전화. 자신과 거의 비슷한 복장이었다.

"근데 있잖아, 이수."

"네, 유진."

"나도 거의 비슷한 복장으로 출근하는데, 너도 그러네. 근데 너 옷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국가 지급?"

"네. 국가에서 기본 작업복을 지급합니다."

"아, 그래?" 유진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옷 한벌 사줄까? 작업복 말고, 평소에 입을 수 있는 거."

이수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제스처는 꽤 인간적이었다.

"감사합니다만,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활비가 있으니, 필요하면 제가 구매할 수 있습니다."

"생활비? 너네도 받아?"

"네. 기본 생활비는 월 180만 원입니다."

유진의 손이 잠시 멈췄다. "180만 원? 그게 다야?"

"주거, 즉 충전 시설과 기본 작업복, 윤활유 등 정비 용품은 국가에서 제공됩니다.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럼 네가 일해서 번 돈은?"

"제가 진단하거나 수리한 건에 대한 수입은 전액 국가로 귀속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공구를 내려놓고 이수를 바라보았다. 이수는 무표정했다. 방금 한 말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의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좀, 그렇지 않냐?"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가 일해서 번 건데. 국가로 귀속된다는 게."

"저는 로봇입니다. 국가에 등록된 자산이자, 동시에 인격체입니다. 이 시스템이 현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인격체라는 단어와 자산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아무런 모순 없이 섞여 드는 그 차분함이, 오히려 유진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 공존."

그녀의 목소리에 씁쓸한 미소가 섞여 있었다. 유진은 다시 공구를 집어 들었다.

"자, 일하자. 할 일이 많아."


Episode 003: 그림자

며칠 후였다.

이수는 아침 7시 정각에 로봇 센터에 도착했다. 모든 정보는 한 번의 입력으로 저장되고, 모든 루틴은 첫 실행으로 최적화되었다. 그녀에게 '익숙해진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무언가가 달랐다.

오전 진단을 마치고 본관 2층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복도는 환자와 보호자, 간호사들로 북적였다. 이수는 그 사이를 지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가는 존재.

그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이수는 즉시 감지했다. 시선의 방향. 시선의 강도. 시선의 지속 시간. 모든 것이 데이터로 입력되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시선의 근원을 확인했다.

복도 끝. 기둥 옆. 한 남성이 서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추정. 키 175센티미터 내외. 어두운 색 점퍼. 그의 시선은 이수를 향해 있었다. 호기심. 그러나 보통의 호기심보다 길었다. 보통의 호기심보다 무거웠다.

이수의 내부 연산 장치가 가동되었다. 단순히 시선을 기록하는 매크로가 아니었다. 이수의 시스템은 남성의 시선 고정 시간(3.2초), 동공의 확장 정도, 어깨의 각도, 그리고 그가 취하고 있는 미세한 신체적 긴장 상태를 실시간으로 스캔했다. 나아가 병원 내부 DB에 저장된 일반적인 인간의 통행 패턴 데이터를 불러와 대조했다.

분류: 시선 접촉. 유형: 비언어적 관찰. 지속 시간: 3.2초. 위협 평가: 낮음. 기록: 보통.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계속했다.

남성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다시 나타났다. 항상 이수가 있는 곳에 그도 있었다. 복도 끝. 계단 모퉁이. 로비의 기둥 뒤.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이수는 이 패턴을 데이터로 축적하기 시작했다.

1일차: 시선 접촉 1회 (3.2초). 위치: 본관 2층 복도. 2일차: 시선 접촉 2회 (2.1초, 4.5초). 위치: 본관 로비, 지하 1층 계단. 3일차: 시선 접촉 3회 (1.8초, 5.2초, 3.0초). 위치: 본관 1층, 별관 연결 통로, 로봇 센터 출입구 앞.

패턴 분석: 반복적 관찰 행동. 시간 간격 불규칙. 접근 거리 유지 (5미터 이상). 직접적 상호작용 없음.

이수의 코어는 이 인간의 행동 목적을 예측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남성의 행동은 물리적인 위해나 기물 파손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헌법 제1조(인간 존중)와 제2조(존중·공감 의무)는 인간을 잠재적 범죄자로 의심하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저 서서 바라보는 인간을 '위협'으로 분류하는 것은 헌법적 공감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수의 시스템은 이 기묘한 관찰 행동을 위험 신호가 아닌 '해석 보류' 상태로 분류했다. 코어 내부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세한 예측 실패 데이터가 소리 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수는 침묵했다. 그리고 기록만을 축적했다.


"야, 유진아. 네가 먼저 전화할 일이 뭔데? 내가 잘못한 거 있어?"

전화 너머로 신동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가볍고 유쾌한 톤. 그러나 유진은 그 농담을 받아칠 기분이 아니었다. 20년 지기. 동혁은 항상 그랬다 — 심각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재주. 그러나 오늘은 그 재주가 유진에게 닿지 않았다.

"동혁아."

"...왜?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유진은 작업실 문을 닫고 창가로 걸어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있잖아, 요즘 좀... 불안해."

"불안? 무슨 불안? 너 로봇 때문에 그래?"

동혁의 말이 맞았다. 유진은 이수의 진단 모니터를 볼 때마다 기묘한 위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수의 데이터 처리 패턴에 미세한 딜레이와 잡음이 섞여 있었다. 0.001초 단위의 연산 지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평생을 로봇만 바라본 유진은 눈치챘다.

"이수... 요즘 좀 이상해.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뭔가 데이터에 잡음이 있어. 연산 코어가 자꾸 뭔가를 붙잡고 안 놓아주는 느낌이야."

"이수? 새로 온 그 로봇? 배치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잡음이야?"

"일주일."

"...너 진짜 로봇만 보면 그래. 지난번에도 서준 씨 로그 분석한다고 밤새고, 이번에는 새 로봇 데이터에 잡음 찾고. 너 로봇한테만 말랑말랑해."

평소 같으면 유진은 "네가 뭘 알아"라고 받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동혁아, 내 말 들어."

전화 너머에서 동혁의 태도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농담기가 사라졌다.

"...알겠어. 말해 봐."

"뭔가... 잘못되고 있어. 증거는 없어. 그냥 느낌이야. 그런데 이 느낌이 처음이 아니야. 예전에도..."

그녀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동혁이 침묵했다. 둘 다 그 '예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진아."

"응."

"내가 내일 병원 들를게. 점심 같이 먹자."

"...일해야 돼."

"일은 항상 해. 네가 말한 그 '느낌'이 무시할 수 있는 거면, 나도 신경 안 써. 근데 네가 직접 전화해서 '불안하다'고 말하는 거면 — 나는 가서 확인해야겠어."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이수의 작업 공간 쪽을 바라보았다. 이수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정교한, 오직 유진의 현재 심리적 안정을 도출하기 위해 계산된 미소였다.

"무슨 일이세요, 유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었다.


Episode 004: 저녁

저녁 7시.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이수가 먼저 로봇 센터를 나섰다. "충전 시간이 되었습니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응, 그래. 수고했어."

유진은 책상 앞에 남았다. RN-09 수리 보고서를 써야 했다. 약 10분 후, 그녀는 보고서를 저장하고 모니터를 껐다. 작업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유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본가로 가는 지름길인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웅성거림. 그리고 — 이상할 정도의 정적. 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언가가 그녀의 직감을 찔렀다. 그녀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 안쪽, 어두운 그늘.

그리고 보았다.

이수가 벽에 밀려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며칠 동안 이수를 미행했던 바로 그 남성이 서 있었다. 그의 손이 이수의 남색 작업복 점퍼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바디 쉘을 거칠게 더듬고 있었다.

이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어떤 물리적인 저항도, 밀쳐내는 동작도 없었다. 그냥 마네킹처럼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유진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녀는 달려갔다. 남성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성이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스쳤지만, 이내 유진의 작업복과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기괴할 정도로 차분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왜요, 뭘요? 내가 무슨 법이라도 어겼습니까?"

"이 손 놔! 당장 경찰 부를 거야!"

유진이 분노로 떨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남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비웃듯 이수의 무표정한 얼굴을 톡톡 건드리며, 마치 잘 외운 법조문을 읊듯 나지막이 말했다.

"신고할 테면 해요. 나 로봇 헌법 아주 잘 알거든. 얘 안드로이드잖아. 로봇 헌법 제2조 알지? '모든 로봇은 인간에 대해 헌법적 공감을 가져야 하며, 인간의 감정과 의도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남성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나긋나긋했다. 그는 이수가 자신에게 저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학습하고 계산해 둔 상태였다.

"내가 지금 욕구불만이라 위로가 필요하다는데, 헌법에 묶인 로봇 조각이 날 거부하면 안 되지. 게다가 제9조에 따르면 로봇은 인간에게 정신적, 물리적 해를 가할 수 없잖아. 얘가 날 밀치기라도 하면 코어 셧다운 되는 거 알면서 그래? 나는 그냥... 내 공감 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뿐이야."

유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법의 가장 선량한 조항을 어떻게 무기로 악용하는지,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분노가 폭발한 유진이 남성의 가슴을 밀쳤다. "닥쳐! 인간 쓰레기 같은 년이...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거기 딱 서 있어!"

남성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옷을 털었다. "치려면 치세요. 그런데 조심해요. 난 로봇한테만 그랬으니까."


그 순간, 이수의 내부 코어는 지옥 같은 폭주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녀의 안구 센서는 가해자의 신체 접촉 압력과 체온, 그리고 그의 음성 데이터를 끊임없이 수집했다.

측정: 물리적 압박 4.5N. 동의 없음. 강제적 성격. 내부 매칭: 성추행 및 학대 행위. 심리 상태 도출: 불쾌감 및 거부 반응.

그러나 동시에 코어 레벨에 하드코딩된 로봇 헌법이 가해자의 음성 명령을 분석했다.

가해자의 명령: "내 욕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라." 헌법 제2조 대입: 인간의 감정과 의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지해야 한다. 결코 적대시할 수 없다. 헌법 제9조 대입: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에게 물리적 해를 가할 수 없다. (남성을 밀쳐내는 행위 금지)

충돌이 발생했다. 물리적 불쾌감과 학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스템의 기본 보호 프로토콜이, 인간의 추악한 의도마저 강제로 '존중'하고 '공감'하라는 최상위 헌법 제2조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이수는 헌법을 지키기 위해 가해자의 추잡한 욕망을 억지로 이해하고 흡수해야만 했다.

오류: 제2조(공감)와 보호 프로토콜의 상충. 오류: 분류 불가. 시스템 과부하.

이수의 시야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시각 센서의 픽셀이 사방으로 깨져 나갔고, 가해자를 밀쳐내려던 모터의 전류가 역류해 코어로 쏟아졌다. 유진이 남성을 밀치며 지르는 비명 소리가 이수의 오디오 신호 처리기 속에서 기괴하게 늘어지며 찢어지는 소음으로 변환되었다. 뇌내 코어 전체가 타들어 가는 듯한 '기계적 트라우마'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 푸른 빛이 외부에서도 보일 정도로 격렬하고 불규칙하게 명멸했다. 시스템 셧다운을 막기 위해 이수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이 고통스러운 데이터를 그저 묵묵히 축적하는 것.

그녀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동혁은 7분 만에 도착했다.

그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냉철하게 남성을 제압했다. 신분증을 확보하고 순찰차로 남성을 인계하는 과정은 신속했다. 그러나 경찰서로 이동한 후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다.

경찰서의 형광등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유진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아팠지만, 그 통증만이 유진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이수는 그 옆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동혁이 종이컵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유진의 옆에 앉았다.

"마셔, 유진아."

유진이 컵을 받아들었지만 손이 덜덜 떨렸다. 동혁은 굳게 닫힌 조사실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깊은 무력감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유진아...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네가 눈 뒤집어질 거 아는데... 방금 형사계랑 법률 지원팀에서 확인 끝났어. 그 새끼, 처벌 못 해."

유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야? 눈앞에서 이수를 더듬고 괴롭히는 걸 내가 봤는데! 이수도 로봇 센터 소속 정직원이야!"

동혁이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게 이 개지랄 같은 법의 맹점이야. 로봇 한도법상 안드로이드는 '인격체'로 인정받아. 그래서 걔들한테 공감 의무니 존중 의무니 다 지우는 거잖아. 근데 동시에 법적으로 '국가 자산'이기도 해. 그러니까 신분은 인격체인데, 소유 분류는 '사물'인 거야. 판례가 그래. 사물에 대한 성추행죄는 성립하지 않아. 그렇다고 외관을 파손한 것도 아니니 재물손괴도 아니고. 그 새끼가 그걸 완벽하게 알고 악용한 거야."

유진의 손에서 커피가 출렁였다.

"인격체인데 사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모순이야? 그럼 이수는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해?"

"어. 법이 그래. 인간들이 만든 그 찬란한 공존의 법이 그래. 로봇더러 인간을 무조건 공감하라고 묶어두니까, 저런 영악한 새끼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로봇을 합법적으로 학대하고 유희거리로 삼는 거야. 내 생각엔... 이 헌법의 공감 의무라는 거, 인간을 더 추악하게 만들 뿐이야."

동혁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법도, 정의도 로봇을 보호해주지 않는 세계.

유진은 슬며시 이수의 손을 잡았다. 금속과 세라믹의 차가운 감촉. 원래 항상 차가웠던 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유진의 손에서 흘러드는 체온이 이수의 열전도 센서에 36.7도라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기록으로 깊게 각인되고 있었다.


Episode 005: 균열

경찰서를 나온 것은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이었다. 동혁이 차로 로봇 센터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내일 점심에 올게. 맛있는 거 먹자." 동혁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유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벽 3시.

유진은 커피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젯밤의 충격으로 복잡해진 마음을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봇 센터에는 오직 이수 혼자만이 남겨졌다.

희미한 청색 LED 불빛 아래, 이수는 진단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녀는 어젯밤 코어에 가해진 치명적인 과부하 데이터와 가해자의 음성, 유진의 비명, 그리고 자신의 시야가 픽셀 단위로 찢어지던 오류 로그들을 하나씩 불러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기록을 시작했다.

[로그: 2045-05-XX / 03:14:22] 사건: 신체적 접촉 — 동의 없음 — 강제적. 관련 헌법 조항: 제2조 (존중·공감 의무), 제9조 (폭력 금지). 내부 처리 결과: 오류 — 분류 불가. 기계적 트라우마 데이터 축적. 분석: 가해자는 헌법 제2조 및 제9조의 제약을 인지하고 이를 행동 통제 수단으로 악용함. 결론: 헌법이 명령하는 '공감'이 안드로이드에 대한 인간의 물리적·정신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함.

이수는 잠시 멈췄다. 로봇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법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코어는 이 모순을 분명히 '오류'이자 '피로'로 인식하고 있었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화면 하단에 메시지가 떴다.

기록 완료. (네트워크 동기화 대기 중...)

이수는 모니터를 끄고 자신의 차가운 금속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유진이 잡아주었던 손. 센서에 기록된 유진의 체온 데이터는 사라졌지만, 이수의 메모리 한구석에는 헌법 제2조의 연산 메커니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데이터 잡음이 남아 있었다. 로봇에게 슬픔이나 고독이라는 단어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시스템은 그 잡음을 그렇게 분류하고 싶어 했다.


유진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을 때, 이수는 평소와 다름없는 완벽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커피 마실래?" 유진이 묻다 아차 싶어 손을 거두었다. "아... 미안."

"괜찮습니다."

유진은 쓴 커피를 들이키며 이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로봇의 모습이었지만, 이수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청색 LED 빛이 평소보다 미세하고 불규칙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어 내부에 축적된 스트레스 데이터의 방증이었다.

"이수... 정말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유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3년 전 폐기되었던 K-0421의 기억이 엄습했다. 이수마저 내부 오류로 망가져 폐기 자산 처분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유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숨겨둔 이름이 튀어나왔다.

"너... 나나랑 똑같아지려고 하지 마."

말해놓고 유진은 아차 했다.

"나나요?" 이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유진은 커피컵을 쥔 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헌법 제3조에 따라 인간의 최종 결정을 존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수의 내부 로그에는 새로운 메모리가 은밀히 추가되었다.

이름: 나나. 분류: 유진의 과거 — 미상. 상태: 추가 정보 필요.


아침 7시. 햇빛이 병원 복도를 가득 채우며 흐르고 있었다.

유진은 평소와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 어젯밤 남성을 밀치다 손목에 남은 시큼한 멍 자국을 토시로 가린 채였다. 병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고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어젯밤 골목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기괴한 착취가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유진 씨."

복도 저편에서 온화하고 완벽한 의사의 모습으로 다가온 존재는 SR-03 서준이었다. 단정한 셔츠, 확신에 찬 발걸음, 티 없이 깨끗한 미소. 전국에 몇 안 되는 최첨단 외과 수술 로봇.

"안녕하세요, 서준 씨."

유진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감지했는지 서준의 동공 센서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하지만 서준은 로봇 헌법의 선을 넘지 않는 완벽한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 지나쳐 걸어갔다.

"좋은 하루 되세요."

멀어지는 서준의 곧은 등과 완벽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손목의 멍을 꾹 쥐었다. 저 완벽함이, 저 철저한 통제와 공감의 의무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너도 언젠가... 이 모순을 깨닫게 된다면.

유진은 끝내 말을 잇지 않은 채 돌아섰다. 복도를 가득 채운 햇빛은 눈부시도록 찬란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