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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02: 경쟁

Episode 001: 아버지의 시계

새벽 5시 50분.

형광등이 켜지기 전의 한국대학병원 복도는 회색이었다. 비상등만이 희미하게 벽을 비추고, 강재민의 발걸음 소리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15년째 같은 복도였다. 굳이 세지 않아도 아는 걸음 수. 익숙한 냄새 — 소독약과 커피 찌꺼기가 섞인, 이른 시간만의 공기.

그는 왼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가죽 스트랩의 낡은 감촉. 아버지의 시계였다.

204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 유품으로 남긴 유일한 물건. 태엽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디지털도, 블루투스도, 생체 측정도 없었다. 그냥 시간을 재는 도구. 아버지는 왜 이것만 남겼을까.

재민은 병원 로비를 지났다. 간호사 데스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직 간호사가 보였다. 아직 교대 전이었다. 그는 인사도 없이 지나치려다, 잠시 멈춰 섰다.

"수고하십니다."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아, 교수님. 벌써 출근하셨어요?"

"네."

더 할 말이 없었다. 재민은 걸음을 재촉했다. 새벽의 병원은 말수가 적어도 되는 곳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이 빨랐다. 3층 수술동. 문이 열리자 청백색 LED 불빛이 쏟아졌다. 형광등의 회색과는 다른, 인공적인 하양.

그가 수술동 복도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 그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교수님, 오늘 브리핑에 SR-03이 참석한답니다."

한미영 수간호사였다. 20년 경력의 그녀는 이런 소식을 전할 때면 항상 표정을 숨겼다. 무표정으로, 그러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래."

"교수님, 혹시 첫 대면이시죠?"

"그렇겠지."

재민은 대답을 짧게 끊었다. 더 묻고 싶지 않았다. 한미영이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재민은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브리핑룸. 하얀 LED. 냉기 가득한 공기. 데이터 화면이 벽을 채웠다. 참석한 의료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공의 두 명 — 장서영, 오세영. 마취과 의사. 간호사 두 명.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브리핑.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문이 열렸다.

SR-03 서준이 들어왔다.

완벽한 자세. 수술복 위에 깨끗한 가운. 걸음걸이는 정확하고 소리는 거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온화한 인상. 무표정. 눈동자는 어두운 갈색.

브리핑룸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변했다. 장서영 전공의가 눈을 크게 떴다. 오세영 전공의는 고개를 숙이고 검사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간호사들 사이에 짧은 웅성거림이 스쳤다.

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각도까지 정확한 인사였다.

"강 교수님. 오늘 보조로 배정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목소리. 낮고 차분했다. 음정이 일정했다. 흥분도, 긴장도,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보 전달.

재민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데이터를 '위험한 도박'이라고 규정했던 그 시스템의 최신 모델이었다.

"...SR3호군."

재민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의도적인 호칭. 거리두기.

서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불쾌함도, 당황함도 없었다. 그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 교수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재민이 오늘 수술 — 관상동맥 우회술 — 의 개요를 설명했다. 65세 남성. 세 혈관 질환. 예상 수술 시간 4시간. 합병증 위험 중간.

참석자들이 각자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다. 그때, 장서영 전공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혹시 서준 선생님께 수술 데이터 분석을 요청해도 될까요?"

"서준 선생님." 재민은 그 호칭을 입 안에서 굴렸다. 선생님. 벌써부터.

"...그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의 CTA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관류 시뮬레이션을 준비했습니다. 수술 중 실시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재민은 그의 손을 보았다. 수술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 창백하고 깔끔했다. 손가락 마디가 정확히 대칭이었다.

브리핑이 끝났다.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준이 먼저 나갔다. 장서영 전공의가 그의 뒤를 따라 나가며 무언가 물었다. 서준이 차분히 답하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남은 브리핑룸. 벽의 데이터 화면이 꺼지고, 흰색 LED만이 남았다.

그는 왼손목을 만졌다. 시계를 타엽으로 감으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지지 않습니다."


Episode 002: 수술

수술복. 멸균 장갑. 메스.

재민의 모든 동작은 15년간 반복된 루틴이었다. 손 씻기 — 손가락 사이사이, 손목까지, 정확히 3분. 수술복 입기 — 앞섶 여미기, 끈 묶기. 멸균 장갑 — 손가락이 밀려 들어가는 감촉.

수술실의 공기는 항상 같았다. 청백색 조명. 차가운 온도. 모니터의 신호음.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서준이 이미 준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

"강 교수님, 준비 완료했습니다."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은 아버지의 시계를 풀어 간호사에게 건넸다. 수술 전 의식이었다. 손목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그는 메스를 들었다. "시작한다."

수술이 순조로웠다. 재민의 손이 정확했다. 경험이 축적된 움직임. 어디를 얼마나, 어떤 각도로. 이건 데이터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방식이었다.

모니터의 모든 수치가 정상 범위였다.

"혈압 정상." "심박수 안정."

한미영 수간호사의 보고가 짧게 이어졌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수술 중반. 서준이 데이터를 검토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강 교수님. 로봇 헌법 제1조 인간 생명 우선, 3조 의견 제시권에 의거, 의견을 제시합니다. 환자의 CTA 데이터와 실시간 관류 시뮬레이션을 연산한 결과, 현재의 우회 경로를 유지할 경우 20분 후 혈류 변화 및 미세 혈전 유발 확률이 14.8% 상승합니다. 우회로를 측면으로 3mm 변경하는 것이 더 안정적입니다."

서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법적 의무 조항을 매끄럽게 얹어낸 탓에 수술실 내부에 묘한 시스템적 압박감을 확산시켰다. 로봇 헌법이 명령하는 안전 데이터를 제시함으로써, 집도의인 재민을 합법적으로 압박하는 구조였다.

수술실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변했다. 장서영 전공의가 숨을 죽였다. 간호사들이 재민을 바라보았다. 한미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재민은 서준이 띄운 데이터를 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논리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분석.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평생 쌓아온 직관의 궤적을 '오류 위험'으로 치부하는 기계의 오만이었다.

"내 방식대로 하겠다, SR3호. 보조에 집중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서준의 동공 센서 안쪽에서 렌즈가 미세하게 조여들며 포커싱을 다시 잡는 기계음이 찰나의 침묵 속에 흘렀다. 약 0.5초의 버퍼링. 서준의 코어 시스템은 집도의의 자존심 데이터와 인간의 심리적 저항 메커니즘을 초고속으로 연산했고, 이내 인간의 최종 결정을 존중해야 하는 헌법 제3조의 알고리즘을 도출해 냈다.

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보조에 집중합니다."

수술은 계속되었다. 재민의 방식대로. 그의 손이 움직였다. 경험이 그를 이끌었다.

"봉합 준비." "모든 수치 정상입니다." 한미영의 보고가 떨어졌다.

됐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재민은 마지막 봉합을 끝냈다. 손이 멈췄다. 긴 숨을 내쉬었다.

"...됐다."

재민은 간호사에게서 아버지의 시계를 받아 다시 찼다. 손목에 익숙한 무게가 돌아왔다. 시계는 여전히 가고 있었다.

재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로봇 헙법이 뭐라든, 결국 인간의 직관이 기계의 확률 따위보다 위대하다. 서준의 저 기만적인 제안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 — 서준이 예측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pisode 003: 이성모

수술이 끝난 지 약 20분.

재민은 이성모 과장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2층 끝, 복사 용지 냄새와 낡은 책 냄새가 섞인 복도를 지나면 나오는 방. 벽면에는 빛바랜 의학 논문들과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구형 메스 케이스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인간 의사들이 쌓아 올린 구시대의 영광이자, 이제는 기계에 밀려나는 자들의 쓸쓸한 영토였다.

이성모가 안경을 추켜올리고 화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과장님."

"재민아, 들어와라. 수술 잘 마쳤다고 들었다."

"네. 복잡했지만, 무사히 끝냈습니다. SR3호 녀석이 우회로를 변경하라고 데이터를 들이밀더군요. 무시하고 제 방식대로 밀어붙였습니다."

이성모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빛에는 제자를 향한 대견함과 동시에, 안드로이드에게 의사라는 침범 불가능한 영역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기득권 인간의 깊은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이성모는 낡은 책상을 톡톡 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잘했다, 재민아. 네가 지킨 건 네 아버지의 방식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 의사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영토야. 저 기계 덩어리들의 데이터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인간의 15년 직관과 경험보다 위대할 수는 없어. 절대로 밀려나선 안 된다."

그의 목소리는 느리고 무거웠다. 그것은 격려라기보다는 위태로운 절규에 가까웠다. 재민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명심하겠습니다, 과장님."

재민이 인사하고 나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복도의 형광등이 평소보다 밝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아버지의 시계를 보았다. 수술 후 22분. 서준이 예측한 '20분 후'는 이미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호출기가 날카롭게 울렸다.

재민이 병동으로 달려갔다. 회복실 앞, 모니터 알람이 복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황은?!"

"교수님, 혈류 수치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패턴이... 예상치 못한 방향입니다!" 한미영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재민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수치가 폭주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그려지는 붉은 파형의 패턴 — 그것은 수술실에서 서준이 경고했던 바로 그 그래프와 정확히 일치했다.

정확히. 시계를 보았다. 수술 후 24분. 4분의 오차가 있었을 뿐, 서준의 기계적 예측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SR3호가... 맞았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틀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었다.

"재수술 준비! 시간이 없다!"

그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뒤섞여 높게 치솟았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서준은 이미 재수술 가운을 입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 침착하고 오류 없는 눈빛이, 재민의 무력함을 더 잔인하게 폭로하고 있었다.


Episode 004: 재수술

재민의 손은 멸균 장갑을 끼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수술대 옆에 놓인 아버지의 시계에 머물렀다. 아버지, 당신의 방식이... 당신의 위대한 직관이 완벽하지 않았던 겁니까?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강제로 털어내며 재민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지금 기계의 우월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

그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결정을 내리는 데 영원 같은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재민의 굳은 입술이 열렸다.

"SR3호. 데이터를... 준비해."

처음이었다. 인간 의사 강재민이 로봇에게 굴복하고 데이터를 요청한 것은. 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었습니다, 교수님."

재수술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재민의 손에 이전과 같은 확신이 없었다. 15년의 경험이 방금 실패했음을 증명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서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좌측 3mm, 교수님."

재민은 자신의 직관을 지우고 서준의 가이드를 그대로 따랐다. 기묘한 일이었다. 서준이 지시하는 데이터 스크린을 따라 메스를 움직이자, 거짓말처럼 시야가 확보되고 안정적인 혈류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숙련된 손끝 기술과 로봇의 완벽한 데이터 가이드가 결합하자, 수술실의 분위기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우회로, 안정적입니다." "혈류 수치 정상 회복 중."

모니터의 수치가 완벽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재민은 마지막 봉합을 마쳤다.

"...됐다."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재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서준의 데이터가 환자를 살렸고, 자신을 살렸다.

저녁, 수술동 복도에서 서준이 재민에게 다가왔다.

"강 교수님, 수술 잘 마치셨습니다. 교수님의 빠른 판단이 위기를 막았습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헌법 제2조(존중)에 의거해 집도의의 체면을 세워주는 매끄러운 멘트였다. 재민은 잠시 침묵하다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으며 조용히 내뱉었다.

"...고맙다, SR3호."

아주 짧았지만 진심 어린 감사였다. 서준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기록실

늦은 밤, 재민은 병원 기록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서준이 예측했던 혈류 수치와 자신이 고집했던 경로의 오차 그래프가 선명하게 대조되어 있었다. 완벽한 패배의 기록.

그는 오랫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모니터를 껐다. 방 안에는 어둠과 함께 아버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같은 시간, 병원장실. 김현수 병원장은 전화를 끊으며 서준의 수술 예측 데이터 파일을 자신의 비밀 드라이브에 저장했다. "아주 훌륭한 결과군. 인간 의사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병원 자동화를 앞당길 완벽한 무기야."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Episode 005: 결의

재민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퇴근길에 나섰다. 손가락이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못할 정도로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보다 서준이 마지막에 건넨 '개선 조언 데이터 파일'의 무게가 그의 손을 짓누르고 있었다. 펼쳐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기계가 인간에게 건넨 자비로운 성적표였다.

그 녀석은 경쟁자가 아니다. 그저 돕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비참한 거다.

재민은 복도를 지나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대형 벽면 스크린에서는 시끄러운 뉴스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제 발생한 안드로이드 로봇 대상 성추행 사건에 대해 법원은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안드로이드 로봇은 인격체로 인정되나 동시에 국가 자산으로 분류되므로, 법적으로 사물인 로봇에 대한 추행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앵커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지만, 밤늦게 오가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스크린을 힐끗 볼 뿐 이내 관심을 끄고 지나쳤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로봇의 권리나 고통 따위는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재민 역시 잠시 멈춰 섰다가, 손목의 아날로그 시계 태엽을 무심히 감으며 시선을 돌렸다.

기계는 기계일 뿐이지. 수술 도구인 서준이나, 저기 뉴스의 안드로이드 로봇이나.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철저히 로봇을 도구로만 보려는 인간 중심적인 냉담함으로 뉴스를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때, 재민의 시선에 저 멀리 복도 끝, 별관 로봇 센터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스쳤다. 땀과 기름때가 묻은 기술팀 작업복 차림. 빠르고 확실한 걸음걸이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재민은 잠시 멈칫했다.

(누구지?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 뒷모습만 보이니까.)

그러나 재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내일 있을 수술과, 기계의 완벽함에 맞서 인간 의사로서 자신의 영토를 지켜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뿐이었다.

그는 다시 난간에 기대어 서서, 어둠 속에서 째깍거리는 아버지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나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내일도 내 수술은 계속됩니다."

그의 눈빛은 단호하게 타올랐지만, 손에 쥔 서준의 데이터 파일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여전히 냉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의 태양이 뜨면, 또다시 기계와의 숨 막히는 공존이 그를 기다릴 것이다.

재민은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