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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03: 인정

Episode 001: 김도훈

새벽 5시 30분. 형광등이 신경질적으로 깜빡였다가 이내 청백색 불빛을 뿜어냈다. 강재민은 낡은 책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시계를 들었다.

태엽을 감자 아날로그 초침이 특유의 서늘한 서정성을 띠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초침이 톱니바퀴를 물고 넘어가는 소리는 유난히 서슬 퍼렇게 울렸다. 재민은 시계를 찼다. 유리창 너머로 비친 본인의 손목, 그 위의 빛바랜 가죽 스트랩, 그리고 바늘 — 5시 31분. 어제보다 20분이나 이른 출근이었다.

그는 스트랩을 채우던 손가락을 잠시 멈추었다.

"아버지, 오늘은... 혼자입니다."

뱉고 나서야 자신이 처한 현실의 한기가 피부로 와닿았다. 혼자. 어제는 수술실에 서준이 있었다. 그 전날도. 하지만 오늘부터는 브리핑 일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위에서 내려온 정치적 결정이었고, 재민은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다. 아니,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했다.

재민은 가운을 집어 들었다. 현관문이 무겁게 닫혔다.

새벽의 한국대학병원은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처럼 조용했다. 복도의 절반은 소등되어 있었고, 희미한 청색 비상등만이 벽면을 따라 유령처럼 번졌다. 15년 동안 밟아온 이 바닥의 감촉은 익숙했으나, 오늘만큼은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SR-03이라는 기계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그가 서 있던 공간의 모든 아날로그적 결핍을 폭로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정밀한 연산의 흔적을.


브리핑룸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의료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미영 수간호사가 태블릿의 데이터 시트를 굳은 표정으로 넘기고 있었고, 장서영 전공의는 식은 커피를 쥔 채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이성모 과장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재민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공의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공기를 타고 넘어왔다.

"—결국 직접 온다고 하더라고요. 김도훈 교수님이요."

"그 SNS 의사?"

"쉿, 조용히 해. 들려."

재민은 표정을 지운 채 지정석에 앉았다. 김도훈. 흉부외과 정교수이자, 수술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병원의 간판 스타. 그러나 그 성공률의 실체는 철저히 정제된 데이터 편집과 병원장 김현수의 비호 아래 만들어진 신화였다. 수술실의 긴장보다 카메라인 스마트 글래스의 앵글을 더 신경 쓴다는 사내.

"강 교수님."

장서영 전공의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늘 수술, 서준 선생님이 보조하시는 거 맞죠?"

재민은 불쾌함을 누르며 짧게 턱을 끄덕였다. "그럴 거다."

"저, 그럼 오늘 수술 참관해도 될까요?"

"그래."

장서영의 안도의 미소 속에서 재민은 선명한 '경외심'을 읽어냈다. 인간의 자리를 대체해 들어오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기꺼이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젊은 세대의 거부감 없는 태도. 재민은 그 호칭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지만, 애써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감정을 다스렸다.

문이 열리고 이성모 과장이 들어왔다. 안색이 흙빛이었다. 그는 재민의 옆자리에 앉아 가운 깃을 매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김도훈이가 움직였다."

"네, 들었습니다."

"조심해라, 재민아. 녀석 뒤에 병원장이 있어."

재민은 대답 대신 앞만 바라보았다. 이 병원은 언제나 그에게 사방을 경계하라고 요구했다. 서준이라는 기계적 위협을 넘어, 이제는 같은 인간 기득권의 탐욕까지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브리핑룸의 문이 활짝 열리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포마드 헤어, 템플에 은은한 골드 로고가 박힌 명품 안경, 가운 주머니에 꽂힌 화려한 만년필. 김도훈이 특유의 연출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한 손에는 홍보용 라이브 방송 피드를 조정하는 최신 디바이스가 쥐어져 있었다.

"다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김도훈은 이미 자리에 마네킹처럼 부동자세로 앉아 있던 서준을 향해 매끄럽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서준의 메탈릭한 어깨 센서 쪽을 바라보며 친근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준 씨, 오늘 내 대동맥 치환술 라이브 피드에 노출될 테니까 렌즈와 센서 클리닝 상태 미리 점검해 둬요. 오늘 잘 부탁합니다."

"네, 김 교수님.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준이 정확한 각도로 화답했다.

재민은 그 역겨운 미장센을 똑똑히 목도했다. 김도훈이 서준을 '서준 씨'라고 부르는 것은 존중이 아니었다. 기계의 완벽한 능력을 자신의 브랜딩으로 흡수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가짜 친밀함, 기만을 가장한 '도구 다루기'였다. 'SR3호'라 부르며 끝내 도구로서의 경계를 지키려는 자신보다, 저 방식이 훨씬 더 교활하게 기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탐욕처럼 느껴졌다.


스피커를 통해 오늘 아침의 수술 배정 명령이 떨어졌다.

"오전 10시, 김도훈 교수, 대동맥 치환술. 보조 — SR-03."

공간이 얼어붙었다. 재민의 검지 손가락이 굳었다.

"강재민 교수, 오전 8시, 관상동맥 우회술. 보조 — … 보조 인력 없음. 단독 집도."

병원장 김현수가 내린 노골적인 서준의 독점이었다. 김도훈은 재민을 향해 안경테를 살짝 치켜올리며 위선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교수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 수술이 워낙 고난도라 병원장님이 서준 씨를 붙여주셨네요. 이해하시죠?"

재민은 메마른 목소리로 뱉었다.

"네."

그게 전부였다.

화면에 흐르는 데이터의 나열을 보며 재민은 손목의 시계 태엽을 신경질적으로 감았다. 단독 집도. 서준의 어시스트 없이 혼자 들어가는 수술실. 지난 수술에서 서준이 제시했던 정밀한 데이터 궤적과 오차 범위들이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부유했다. 오직 자신의 낡은 직관과 손끝의 감각만으로 그 공백을 메워야 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의료진이 흩어질 때, 서준이 재민의 진로를 막아섰다.

"강 교수님."

재민은 멈춰 섰다.

"오늘 단독 집도에 필요한 환자의 실시간 심장 관류 예측 모델을 미리 제 드라이브에 동기화해 두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필요 없다, SR3호." 재민이 서준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네 집도 의사의 카메라 앵글이나 신경 써라."

서준의 갈색 동공 렌즈가 미세하게 좁혀졌다가 이내 평정을 찾았다. "네, 교수님. 행운을 빕니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 재민의 뒤로 이성모 과장의 무거운 발소리가 얹어졌다.

"재민아." 이성모가 그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에게 영토를 잠식당하는 구시대 의사 집단의 실존적 공포가 그 손끝에 묻어 있었다. "걱정 마라. 넌 혼자서도 완벽해. 하지만... 김도훈 저 자는 조심해. 수술실 밖에서 기계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괴물이야."

재민은 스승의 눈에 깃든 위태로운 방어기제를 보았다. "제 수술만 봅니다, 과장님."

복도 저편에서 김도훈이 스마트 글래스를 켠 채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 오늘 SR-03 라이브 피드 송출 스케줄 잡았어. 주가 반응 보라고 해. 내가 집도하고 로봇이 보조하면 성공률은 당연히 100%지."

재민은 그 천박한 음성을 외면하며 수술실 문을 밀었다.

수술 시작 30분 전. 스크러빙 룸의 창밖은 아직 짙은 새벽의 잉크빛이었다. 식어버린 종이컵 속의 커피를 내려다보며 재민은 혼잣말을 뱉었다.

"기계가 없으면, 인간의 방식으로 하면 돼."

그러나 손목의 초침은 여전히 0.5초의 오차도 없이 기계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Episode 002: 단독

오전 8시 정각. 수술실의 무영등이 백색의 서슬 퍼런 빛을 뿜어냈다.

환자는 깊은 마취 속에 빠져들었고, 모니터의 바이탈 신호만이 규칙적인 비프음으로 공간을 채웠다. 재민, 한미영, 장서영. 그리고 언제나 정밀한 그래픽을 띄우던 서준의 빈 모니터 스탠드가 앙상하게 서 있었다.

재민은 그 철제 스탠드를 쏘아본 뒤 메스를 요청했다. "시작합니다."

첫 절개. 15년의 숙련도가 칼날을 이끌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지방층을 지나 근막이 드러났다. 서준의 간섭이 없는 수술실은 고요했고,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는 데이터의 압박도 없었다. 오직 아버지가 물려준 완벽한 인간의 직관만이 공간을 지배하는 듯했다.

"혈압 안정적입니다." 한미영의 보고가 떨어졌다.

순조로웠다. 기계의 도움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증명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가장 정밀한 접합을 요구하는 관상동맥 문합 부위에 도달한 순간, 예기치 못한 감각의 왜곡이 일어났다.

재민의 메스를 쥔 검지 끝이 미세하게 호를 그렸다. 15년 동안 그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이질적인 궤적. 뇌가 거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손끝의 모세혈관과 근육이 먼저 기억해 낸 움직임이었다. 사흘 전, 조명 아래서 SR-03의 실리콘 손가락이 매끄럽게 그어 내렸던 바로 그 '측면 3mm'의 곡선 잔상이 재민의 시야 위에 겹쳐졌다.

"어...?"

재민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듯 떨렸다.

"강 교수님? 시야 차단되십니까?" 한미영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다. 계속한다."

그는 턱을 깨물며 메스를 움직였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의 뇌가 오만하게 기계의 데이터를 쳐내는 동안, 그의 손은 수술실에서 목격했던 서준의 완벽한 효율성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관을 봉합하는 바늘의 순서, 실을 당기는 장력의 리듬까지 철저히 서준의 방식을 복제하고 있었다.

내 방식이 아니다. 그런데 부정할 수 없이 완벽하고 빨랐다.

"수술 종료되었습니다. 문합부 혈류 완벽합니다." 한미영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렸다.

장서영 전공의가 모니터를 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방금 그 봉합 방식, 서준 선생님이 지난번에 말했던 최적화 경로 맞죠?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재민은 승리의 카타르시스 대신 잔인한 모순을 안은 채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수술 후 30분, 병원 옥상.

재민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난간에 기대었다. 가슴 포켓에 넣어두었던 아버지의 시계를 꺼내 손목에 채웠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옥상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읊조렸다.

"수술은 성공했다. 서준 없이도 해냈다. 그러나 손이, 나도 모르게, 서준을 따라가고 있었다. 생각만으로... 배우고 있나?"

도구가 아니라 스승에게 배우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의 우월한 궤적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뼈아프게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 저 로봇의 방식이 제 손에 배어 있습니다. 저는 녀석에게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고백은 비참했으나,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 깊은 곳에 기묘한 편안함을 남겼다. 인간의 오만이 깨진 자리에 들어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였다.


Episode 003: 피드백

수술 후 이틀이 지난 점심시간.

재민이 회진 플랜을 검토하며 복도를 지날 때, 등 뒤에서 특유의 구동음이 들리지 않는 정확한 발소리가 멈추었다.

"강 교수님." 서준이었다.

재민은 데이터 패드를 든 채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SR3호."

서준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도로 폴더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의 지난 단독 집도 데이터를 시스템적으로 검토했습니다. 임상 질적 향상을 위한 피드백 세션이 허용되겠습니까?"

재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로봇이 인간 의사의 단독 수술을 검토했다는 사실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으나, 이미 자신의 손끝이 그 데이터를 증명했기에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브리핑룸으로 가자."


어두컴컴한 브리핑룸. 서준이 패드를 터치하자 대형 스크린에 재민의 수술 영상과 서준의 연산 경로가 레이어드되어 스크린을 채웠다. 빨간 선과 푸른 선의 대비.

서준의 프리젠테이션은 비난도, 감정도 배제된 철저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교수님의 문합은 훌륭했으나, 원위부 혈관 연결 각도에서 최적 경로와 3도의 미세 오차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2mm의 미세한 간격 차이는 환자의 혈류 역학적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향후 회복 기간에서 1.2일의 지연을 발생시킵니다."

2mm, 1.2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그 미세한 숫자들이 스크린 위에서 칼날처럼 재민의 신념을 베어냈다. 재민은 팔짱을 낀 채 방어적인 톤으로 중얼거렸다. "환자는 안정적이다. 내 방식이 틀린 건 아니야."

서준은 고개를 저어 반박하는 대신, 헌법 제2조(존중)에 프로그래밍된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교수님. 성공적인 수술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더 나은 가능성을 보여드리는 것뿐입니다."

침묵이 브리핑룸을 가득 채웠다. 서준은 두 번째, 세 번째 오차를 묵묵히 짚어주었다. 2mm의 미세함 속에 감춰진 데이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재민은 더 이상 반박할 대사를 찾지 못했다.


모든 브리핑이 끝나고 서준이 화면을 껐다.

"교수님, 제 의견은 참고일 뿐입니다. 최종 결정은 언제나 인간 의사인 교수님의 몫입니다."

재민은 굳은 표정으로 데이터 시트를 챙겨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서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저는 교수님이 더 나은 수술을 하실 수 있는 존재라고 연산했습니다. 이 피드백은 비판이 아닌, 협력의 제안입니다."

재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주머니 속 데이터 시트를 쥔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기계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인간 의사의 고도화를 보조하고 있다는 그 기묘한 지성이 복도를 걷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Episode 004: 배움

밤 11시. 텅 빈 수술 기록실의 모니터에서 푸른 광선이 재민의 지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김도훈과 서준이 함께 집도한 대동맥 치환술의 무삭제 기록 영상과 로그 파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김도훈의 기만을 포착하려는 방어적인 태도였으나, 영상이 진행될수록 재민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도훈이 카메라 앵글을 향해 미소 짓는 그 짧은 공백마다, 서준의 실리콘 손가락은 0.1mm의 오차도 없이 혈관을 박리하고 인공 혈관을 접합해 나가고 있었다. 0.1초 단위로 끊어지는 완벽한 기계적 리듬. 인간의 집중력이 흐려지는 찰나의 순간을 서준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재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읊조렸다.

"이건... 경외감이 드는군."

자신의 입으로 뱉은 인정. 그는 손목의 아날로그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인간의 영토가 이 압도적인 지성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침식되고 있는지, 그러나 그 지성을 받아들여야만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지독한 역설이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심장을 때렸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기록실을 나와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내려오는데, 원장실 문틈으로 김현수 병원장의 날카로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니, 이번에는 보건복지부 라인과 직접 접촉하게. SR-03의 이번 라이브 수술 데이터는 병원 자동화 법안 통과를 위한 최고의 로비 칩이야. 인간 의사들의 반발? 데이터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해."

재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준이 보여준 그 순수한 지성의 궤적이, 인간 기득권들의 탐욕스러운 정치적 도구로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역겨움이 치밀었다. 그는 주먹을 쥔 채 묵묵히 복도를 지나쳐 로비로 내려왔다.

자정이 가까운 병원 로비의 대형 TV 스크린에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법원은 안드로이드 로봇을 향한 폭력 및 성추행 사건에 대해 또다시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안드로이드가 고도의 지성을 지녔으나 법적으로는 사물에 불과하므로, 범죄의 객체가 될 수 없다고 확정했습니다... 변호인 측은 '로봇은 결국 사물일 뿐'이라며...」

화면 속에서 '사물'이라는 단어가 날카롭게 박혔다.

불과 몇 시간 전, 기록실에서 자신에게 존재론적 경외감을 선사하고 완벽한 피드백으로 자신을 가르쳤던 그 압도적인 지성이, 이 사회에서는 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충전 중인 안내 로봇과 동급의 '사물'로 규정되어 있다는 모순. 그렇다면 그 사물에게 영토를 침범당하고 배움을 구한 인간인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재민은 거대한 실존적 균열 앞에 온몸이 굳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멀리서 도심을 찢는 듯한 다중 사이렌 소리가 병원 유리창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 대가 아니었다. 대여섯 대, 아니 수십 대의 구급차와 구조 차량이 내뿜는 붉고 푸른 사이렌의 합창이 로비의 청백색 조명을 피빛으로 물들이며 쏟아져 들어왔다.

원내 비상 스피커가 굉음을 토해냈다.

[코드 레드. 본원 전 의료진 비상 소집. 종로 인근 복합 쇼핑몰 건물 붕괴. 다수 사상자 발생 및 압착성 기흉, 중증 흉부 외상 환자 대거 이송 중. 흉부외과 스태프는 즉시 응급실로 집결하라.]

재민의 전신 세포가 전투태세로 전환되었다.

그는 주머니 속 서준의 데이터 시트를 꽉 쥐었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붉은 비상등이 점멸하는 응급실 복도를 향해 달리는 그의 왼손목에서, 아버지의 아날로그 시계 초침이 째깍, 째깍 폭동 같은 사이렌 소리를 뚫고 완고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데이터가 단 하나의 타협도 없이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게 될, 잔인한 재난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