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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05: 협력

Episode 001: 복귀

새벽 5시였다.

강재민은 병원 로비에 서 있었다. 헬기에서 내린 지 10분. 붕괴 현장의 먼지가 아직 폐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냄새 — 소독약, 커피, 형광등의 건조한 여열.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재민은 무심결에 스마트패드를 켰다. 본원 기획조정실 주위를 흉흉하게 감돌고 있는 기밀 유출 및 로봇 원격 개입 은폐 의혹에 관한 병원 내부 속보가 화면을 채웠다. 재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미련 없이 화면을 휙 쓸어 넘겨버렸다.

"내 일 아니다.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지."

복잡한 정치적 스캔들에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패드를 주머니에 밀어 넣는 순간, 그의 손끝이 가슴주머니 속 유진의 스케치에 닿았다. 타인의 일에는 이토록 차갑게 선을 그으면서도, 현장에서 마주한 로봇의 데이터—그 가공되지 않은 진실에는 자꾸만 손이 간다.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모순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민이 안으로 들어갔다. 3층, 과장실.


이성모 과장이 재민을 맞았다. 그의 책상 위에는 아침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커피 냄새.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고했다. 붕괴 현장, 많이 힘들었지?"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습니다."

평소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성모가 눈썹을 움직였다. 그는 제자를 오래 봐 온 스승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했다.

"무슨 일 있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민은 가슴주머니를 의식했다. 그 안의 종이. 그리고 그 종이를 만든 사람.

"...로봇 데이터가 도움이 됐습니다."

이성모의 손이 커피잔에서 멈췄다.

"SR-03도 갔었어?"

"아니요. 기술팀의 구조 로봇이었어요. R-17이라고... 붕괴 직전까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 데이터로 매몰자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어요." 재민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서준의 수술 데이터도 현장에 전달됐습니다. 이수가 전달한 거예요."

이성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재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수뇌부의 정치적 레이어가 아직 표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거대한 조짐이 느껴졌다.

이성모가 화제를 돌렸다.

"새 케이스 하나 들어왔어. 20대 후반 여성, 마르판 증후군. 대동맥 근부 5.2cm. 봐 줘."

그가 차트를 건넸다. 재민이 받아 들었다.


복도. 재민은 차트를 검토했다.

20대 후반 여성. 마르판 증후군 — 결합 조직의 이상으로 대동맥이 늘어나는 유전 질환. 대동맥 근부 5.2cm. 수술 기준인 5cm를 넘겼다. 판막 상태는 아직 건강했다.

수술 방법은 두 가지.

Bentall 수술 — 대동맥과 판막을 모두 인공으로 교체. 성공률은 높고 반영구적이었다. 그러나 평생 와파린을 복용해야 했다. 와파린은 임신 중 기형과 유산 위험을 크게 높였다.

David 수술 — 판막을 보존하고 대동맥만 인공 혈관으로 치환. 와파린이 필요 없었다. 임신과 출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수술이 매우 까다로웠다. 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재민은 차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환자는 20대 후반이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 임신을 꿈꿀 나이.

그는 차트를 접었다.


옥상.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재민은 난간 앞에 서서 아버지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날 새벽, 그는 이 자리에서 "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다음에는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늘.

그는 시계를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 저 로봇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말하고 자신도 놀랐다. "지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쳤던 그가 — 지금, "괜찮다"고 나직이 읊조리고 있었다.

긴 침묵.

"그리고... 내일,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의 일생. 결혼. 임신. 가족. Bentall과 David.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대답은 없었다. 바람만 불었다. 재민은 시계를 차고, 옥상을 내려왔다.


Episode 002: 딜레마

상담실. 흰 벽, 깨끗한 테이블, 형광등의 조용한 윙윙거림.

재민은 환자와 보호자 앞에 앉아 있었다. 환자는 20대 후반의 여성.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손가락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살짝 감싸고 있었다. 어머니가 함께 왔다. 두 사람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포개져 있었다.

재민이 차트를 펼쳤다.

"대동맥 근부가 5.2cm까지 늘어났습니다. 수술이 필요합니다."

환자의 어머니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재민은 천천히, 또렷하게 설명했다. Bentall의 확실함과 와파린의 제약, David의 위험성과 그 너머의 가능성. 설명을 마친 후, 재민은 잠시 말을 아꼈다.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했다. 선택은 환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환자가 물었다.

"선생님, 저...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아이도... 낳고 싶어요."

재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생이 지금, 이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침묵.

"알겠습니다." 재민이 말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록실. 재민은 혼자 데이터를 검토했다.

David 수술의 성공 통계 — 이 병원에서의 단독 집도 사례는 많지 않았다. Bentall을 권하는 것이 의사로서 가장 안전하고 비난받지 않을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았다. 붕괴 현장에서 출혈점을 찾지 못해 손이 멈춘 순간, 그리고 이수를 통해 원격으로 닿았던 서준의 가이드가 떠올렀다. 그 완벽한 경로 투사가 없었다면 환자는 테이블 위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법 조항이 스쳤다.

로봇 헌법 제1조: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과 안전이 로봇의 판단보다 우선한다.

현장에서 서준이 수술 데이터를 투사하려 했던 것 역시 그 법적 명령에 따른 필연적인 연산이었을 터다. 그들은 법에 따라 생명을 구하려 의무를 다하는데, 나는 인간 의사의 자존심이라는 하찮은 명분으로 그 데이터를 무시했었다.

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준을 찾으러 갔다.


브리핑룸. 형광등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서준이 들어왔다. 물리적 등장 없이 이수를 통해서만 존재했던 현장 이후, 첫 대면이었다. 그가 서 있는 모습은 첫 대면 때와 같았지만, 공기의 무게가 달랐다.

"SR3호. 이번 케이스, 봤어?"

"네, 교수님. 마르판 증후군 환자. 대동맥 근부 치환술."

재민이 말했다.

"David으로 가기로 했어."

잠시 침묵. 서준이 대답했다.

"고난도 수술입니다. Bentall에 비해 성공률이 —"

"알아." 재민이 말을 끊었다. "그래서... 너랑 같이 하고 싶어."

서준이 재민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짧은 침묵이 있었다. 첫 대면 때와 같은 길이의 침묵이었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네, 교수님. 준비하겠습니다."

"함께 방법을 찾자." 재민이 말했다. 그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Episode 003: 준비

재민과 서준이 나란히 앉았다. 예전처럼 마주 보고 대립하는 형세가 아니었다. 나란히, 같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어떻게 생각해, SR3호?"

재민이 먼저 물었다. 예전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서준이 데이터를 띄웠다. 환자의 3D 심장 모델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대동맥 근부가 5.2cm로 부풀어 있었다.

"David 수술의 핵심은 판막 고정의 정밀도입니다. 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야. 수술 중 변수까지 고려한 시뮬레이션 가능해?"

"네. 3D 모델링으로 최적 경로와 세 가지 대비책을 준비하겠습니다."


서준이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모니터 속에서 가상의 심장이 박동했다. 절개, 인조 혈관 봉합, 판막 고정 단계가 데이터로 계산되어 흘러갔다.

"이 경로가 데이터상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나 환자의 판막 조직 상태에 따라 2mm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재민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내가 손으로 감각을 따라가는 게 낫겠어. 데이터가 모든 변수를 다룰 순 없으니까. 특히 살아 있는 판막 조직은 3D 모델과 다를 수 있어."

서준이 대답했다. "교수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제 데이터는 교수님의 손을 보조하겠습니다."

시뮬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재민의 손이 무심결에 가슴주머니를 스쳤다. 서준이 그것을 포착했다.

"그것은... 교수님의 데이터인가요?"

재민이 잠시 망설이다가 접힌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빼곡한 숫자들과 스케치.

"아니요. 붕괴 현장에서... 기술팀의 누군가가 만든 거야."

서준의 시선이 종이 위를 짧게 스쳤다. "R-17 데이터 스케치네요. 기술팀의 나유진 씨가 작성한 것입니다. 유능한 엔지니어입니다."

재민은 서준이 그녀를 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깊이 묻지 않고 종이를 다시 접어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밤이 깊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시뮬레이션과 세 가지 대비책 완료.

재민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어."

서준이 대답했다. "네, 교수님."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SR3호. 고맙다."

서준의 대답 — 그 사이에 짧은 침묵이 있었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교수님."

재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문득 서준이 대답하기 직전에 보인 그 미세한 간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데이터 처리 시간일까. 아니면—— 설마 저 녀석, 방금 감정을 흉내 낸 건가? 인간의 영역을 모방하려는 기계의 정교한 연출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이질감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스쳤다. 재민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걸어갔다. 내일을 위해.


Episode 004: 1mm

수술실. 차가운 청백색 조명.

재민과 서준이 나란히 섰다. 모니터에 환자의 실시간 바이탈이 표시되고 있었다. 심박수 72, 마취 상태 안정. David 수술의 단독 집도 성공률은 낮았지만, 함께 준비한 시뮬레이션이 그 확률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작한다."

메스가 대동맥을 열었다. 서준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가이드를 투사했다. 예전에는 무시했던 격자무늬가 오늘은 완벽한 이정표로 보였다.


단계 1 — 대동맥 절개 및 판막 상태 확인 재민의 손이 움직였다. 서준이 경식도 초음파 데이터를 분석하며 말했다. "판막 날개, 상태 양호. 보존 가능. 역류 없음."

단계 2 — 인조 혈관 준비 및 봉합 위치 결정 서준의 3D 매핑 데이터가 재민의 손을 안내했다. "봉합 시작점, 여기입니다." 재민의 손이 정확한 지점에 닿자 데이터가 업데이트되었다. "오차 0.1mm... 0mm."

단계 3 — 판막 고정. David 술식의 심장. 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구간. 수술실에 지독한 긴장이 감돌았다. 서준이 말했다. "왼쪽 0.5mm 위."

예전의 패배와 떨림은 없었다. 재민의 손이 확신을 가지고 정확히 0.5mm 위로 움직였다. "좋습니다." 서준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서준 POV insert — 내부 로그] 내부 클록: 03:47:12.004. 대상(강재민)의 손을 주시 중. 데이터 수집:

  • 손 떨림: 0.02mm 미만 (정상 범위)

  • 심박수: 78bpm (안정 범위)

  • 집중도: 98.7% (최대)

좌측 판막 고정 완료. 오차 0.3mm. 우측 진행 중. 감지:

  • 처리 속도: 0.03% 증가.

  • 코어 온도: 0.1도 상승.

원인 판단 불가 — 외부 데이터 요청 없음. 자발적 변화. 분류: 긍정적. 그러나 이 분류의 기준은 기존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는다. 분석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함. 그리고 — 처음으로 — 이것을 더 이상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단계 4 — 완성

"판막 고정 완료." 서준의 음성이 수술실에 울렸다. "역류 없음. 완벽합니다."

재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수술실의 긴장이 일제히 풀렸다. 지표는 모두 정상, 성공이었다. 재민이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끝에 맺힌 떨림은 패배가 아닌 성취의 떨림이었다.

그가 서준을 바라보자, 서준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실의 조명은 그대로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Episode 005: 오해와 이해

회복실.

재민은 깨어나는 환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인공 기계가 아닌, 그녀 자신의 판막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환자가 눈을 뜨며 작게 미소 짓자, 재민도 나직하게 답했다.

"잘됐어요. 수술은 성공이에요."


옥상. 석양이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재민은 아버지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던 공간에서, 그는 이제 다른 진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 제 손으로, 저 로봇과 함께 환자를 살렸습니다. 함께여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가웠던 시계의 금속 체인이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복도. 재민은 서준과 마주쳤다. 수술 예후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눈 후, 재민이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SR3호. 기술팀의... 나유진 씨.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서준이 평소와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뛰어난 엔지니어입니다. R-17의 데이터를 그녀가 직접 복구했습니다.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잔해 속에 들어가 메모리 모듈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매몰자의 위치를 찾는 데 3시간이 더 걸렸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팔에 부상도 입었고요."

재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붕괴 현장의 조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당신은 로봇 구하세요. 나는 사람 구하겠습니다." 자신이 뱉었던 날카로운 말들. 잔해 위에서 피를 흘리던 그녀의 손목. 그걸 보고도 차갑게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자신의 2초. 헬기장에서 나누었던 그 냉랭한 인사...

그녀가 다쳐가며 복구한 데이터가 8명의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로봇 타령을 한다며 모욕했던 그 데이터가.

서준이 조용히 덧붙였다. "유진 씨는 교수님을 좋은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여러 번 말했습니다."

서준이 인사를 건네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가슴주머니에서 유진의 데이터 스케치를 꺼냈다. 접힌 종이의 모서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신이 의사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동안,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진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유진 씨."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복도 끝, 창밖으로 타들어 가는 석양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