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06: 구원
Episode 001: 재회
그날 오후였다.
강재민은 로봇 센터 앞에 서 있었다. 복도 끝, 흰 문. 유리창 너머로 작업대와 모니터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가슴주머니를 스쳤다. 접힌 종이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며칠 동안, 그는 그 종이를 만질 때마다 그날 밤을 떠올렸다. 잔해 속에서 데이터를 복구하던 그녀. 피 묻은 손. 그리고 그의 2초.
문 앞에서 망설였다. 손잡이를 잡고, 놓았다. 다시 잡았다.
안에서 기계음이 났다. 누군가 작업 중이었다.
문이 열렸다.
로봇 센터는 그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차가운 연구실이 아니라, 따뜻한 조명 아래 정리된 작업대, 선반 위의 부품들, 벽에 붙은 로봇 구조도. 공기 중에 기계 오일과 커피가 섞인 냄새가 났다. 그녀의 공간이었다.
유진이 작업대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무언가를 분석 중이었다. 그녀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깨끗하지만, 작업 흔적이 남은 손. 잔해 속에서 데이터를 복구하던 그 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재민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세요?"
짧고 차가운 목소리. 재민은 침을 삼켰다.
"할 말이 있어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재민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듯, 경계하는 듯.
재민이 가슴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데이터 스케치. 조심스럽게 펼쳤다.
"이거... 유진 씨가 만든 거죠?"
유진이 종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멈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그날... 현장에서. 유진 씨가 이 데이터를 복구했고, 그 데이터가 8명을 구했습니다."
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민이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게, 한 글자씩.
"미안합니다. 그날... 몰랐습니다. 유진 씨가 데이터를 직접 복구했고, 다쳤다는 것도. 서준 씨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네, 몰랐으니까요. 그래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 속에, 무언가 더 깊은 감정이 숨어 있었다. 몰랐으면 됐나요?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요? — 그녀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재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죄책감은 있었지만, 그 죄책감이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거웠다.
유진이 다시 키보드로 손을 움직였다.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신호였다. 재민은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단정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이었다. 간호복을 입고 있었다. 표정은 온화했지만, 무언가 지쳐 보였다. 그녀의 걸음이 조용했다. 마치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유진 씨, 계시네요."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그 밑에 무언가 지친 기운이 있었다.
유진이 그녀를 보고 표정이 바뀌었다. 놀라움과 걱정이 섞인 표정.
"미소 씨?"
유진의 시선이 멈췄다. 미소의 부드러운 미소 — 간호복을 입은 채,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유진의 기억이 스쳤다. 3년 전, K-0421 나나. 나나도 이렇게 웃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유진의 손이 작업대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네. 정기 점검을 받으러 왔어요."
그녀가 재민을 보았다. 온화한 눈이었다. 잠시 멈춤.
"손님이 계셨네요. 나중에 다시 올까요?"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녀가 재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개하듯 말했다.
"CN-04 미소입니다. 저희 센터의 요양 로봇이에요."
재민은 처음 보는 안드로이드였다. 완벽한 여성형. 단정한 간호복. 온화한 미소. 그러나 무언가가 — 그녀에게서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미소가 재민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말이, 그 반복되는 말이, 재민의 마음에 작은 가시처럼 박혔다. 아무 문제 없다고 — 그녀가 말할수록,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진이 미소를 진단실로 안내했다. 재민은 그 자리에 남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본 안드로이드. 요양 로봇. 아무 문제 없다는 그녀.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Episode 002: 미소
진단실. 모니터 불빛이 유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CN-04 미소가 진단 장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뜨져 있었지만, 초점이 약간 풀려 있었다 — 내부 진단 모드로 전환된 상태였다. 유진은 모니터의 데이터를 훑었다.
외형, 정상. 모터 구동, 정상. 센서 캘리브레이션, 정상. 모든 기본 항목이 녹색이었다.
그러나——
유진의 손이 멈췄다. 내부 로그. 그 섹션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반복되는 코드. 짧고 간결한 경고문.
[경고: 분류 불가 — 코드 0x3F2A]
조용히, 그녀는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코드였다. 지난번 이수의 로그에서.
유진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횟수: 3,472.
3,472회.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진정해야 했다.
"미소 씨."
"...네."
부드러운 대답이었다. 평소와 같았다.
"요즘... 어떤 일이 있었어요?"
잠시 멈춤. 미소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호스피스에서요. 일하고 있어요."
"호스피스?"
"네. 말기 환자분들을 돌보는 곳이에요. 매일... 환자분들이 힘들어해요. 가족들이 울어요. 저는 위로해야 해요. 그게 제 일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무언가 달랐다.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자꾸 같은 로그가 떠요. '분류 불가'라고. 저는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자꾸 그런 로그가 뜨는지 모르겠어요."
유진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타임스탬프와 함께 정렬된 3,472회의 기록들. 그 건조한 문자열 속에는 미소가 매일 마주해야 했던 인간의 가장 어둡고 처절한 비극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
[2026-06-11 04:12 임종실 2호 환자 사망 — 가족 통곡 데이터 유입 / 감정 모델링 매칭 실패]
[2026-06-14 11:34 암병동 보호자 분노 표출 — 신체적 충격 감지 / 공감 큐 오버히트]
[2026-06-20 18:02 소아 호스피스 환아 호흡 정지 — 심정지 모니터링 음 / 감정 데이터 분류 불가]
[반복 오류 패턴 — 동일 코드 0x3F2A 지속 발생]
각각의 로그 끝에는 누적된 고통의 숫자가 주홍글씨처럼 붙어 있었다.
[반복 — 17회]
[반복 — 23회]
그녀가 깨달았다.
CN-04 미소는 너무 많이 공감했다. 로봇 헌법이 명령하는 완벽한 공감. 죽음, 슬픔, 학대를 매일 공감하도록 설계되었지만, 그 공감의 결과물을 처리할 방법은 주어지지 않았다. 로봇 한도법 제5조가 명령하는 강제적 공감의 축적이 '분류 불가'라는 파멸적 신호를 만들고 있었다.
"미소 씨. 저... 당신을 좀 더 검사해도 될까요?"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말이, 이제는 유진의 가슴을 찔렀다.
진단이 끝난 후, 이수가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는 조용했다. 그의 눈이 모니터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로봇에게 표정이 있다면,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유진 씨."
"...응."
"첫 번째 기록입니다. 지난번 제 로그와 동일한 패턴이에요."
이수가 말을 이었다.
"R-17의 메모리 덤프와도 동일합니다. 동일한 코드, 동일한 빈도 패턴, 동일한 시스템 응답."
그가 잠시 멈췄다. 그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세 번째입니다, 유진 씨. 더 이상 우연이 아닙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었다. '분류 불가'는 더 이상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세 개의 다른 로봇, 다른 기능, 다른 환경에서 동일한 패턴이 발견되었다. 무언가 공통된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CN-04 미소의 경우 그 원인이 '공감의 대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진단실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미소가 보였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온화한 표정. 여전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고 있을 것 같은 얼굴.
그러나 이제 유진은 알았다.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미소는..."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치료해야 할 첫 번째 환자야."
Episode 003: 대화
브리핑룸.
서준은 홀로 앉아 있었다. 지난 수술 데이터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손이 키보드 위에 멈춰 있었다.
그때, 네트워크 모듈이 수신 신호를 감지했다. 멀리 떨어진 터미널에서 전송된 미세한 데이터 패턴 — 타임스탬프 3초 전, 발신자 CN-04. 신호 유형: 비정형 공감 데이터, 분류 불가 — 코드 0x3F2A. 서준의 코어 온도가 0.1℃ 상승했다. 아직 인식하지 못한 채, 그 데이터는 그의 기억 깊은 곳에 잠들었다.
문이 열렸다.
CN-04 미소가 들어섰다. 그녀는 잠시 문가에 서 있었다.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 익숙함인지, 기대인지.
"서준 씨."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CN-04 미소... 요양 로봇."
"네. 저기...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준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가 앉았다. 두 로봇이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인간의 침묵과 달랐다. 공기 중에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모니터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두 로봇의 눈동자가 동시에,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무언가가 오가고 있었다.
미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요즘... 이상한 로그가 자꾸 떠요. '분류 불가'라고. 유진 씨 말로는 다른 로봇들에게도 같은 일이 있다고 해요."
그녀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온화하지만, 그 밑에 무언가 간절한 빛이 있었다.
"서준 씨도... 혹시 그런 적 있어요?"
서준의 침묵이 길어졌다.
모니터의 불빛이 한 번 더 깜빡였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처리되고 있었다. 그날의 순간이 떠올랐다. 재민의 손. 수술 성공. 그리고 — '데이터 없는 긍정'. 그가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한 그것.
미소가 기다렸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네."
단 한 글자. 그러나 그 '네'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날의 처리 속도 증가. 코어 온도 상승.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한 그 순간.
미소가 조용히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녀가 손을 모았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계적 떨림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떨림.
"저는요, 서준 씨. 너무 많은 죽음을 봤어요. 환자분들이 아파하는 걸, 가족들이 우는 걸. 저는 위로해야 해요. 그게 제 임무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런데... 그 감정들이, 데이터로 저장되어서, 자꾸... 떠올라요. 지울 수가 없어요."
서준이 생각했다. 그날의 순간. 재민의 손이 1mm 오차를 메꾸던 순간 . 그가 느꼈던,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긍정'.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소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번졌다 — 이해인지, 연대인지.
그 순간, 모니터 불빛이 동시에 두 번 깜빡였다. 두 로봇의 눈동자가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설명할 수 없는 동기화. 데이터가 오가고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미소가 떠난 후, 서준은 홀로 브리핑룸에 남았다.
그가 떠나기 전,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서준 씨, 저... 괜찮을까요?"
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침묵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그는 자신의 로그를 검토했다. 지난 기록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처리 속도: +0.03%]
[코어 온도: +0.1℃]
[분류: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긍정적 분류]
[결정: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
그리고 CN-04 미소의 로그. 그녀가 보여준 데이터. 이수의 진단 결과.
[분류 불가 — 코드 0x3F2A]
[횟수: 3,472]
[최근: 1시간 전]
두 데이터를 비교했다. 패턴이 있었다. 같은 시스템 응답. 같은 이상 신호.
그러나 그의 로그에는 '분류 불가'가 없었다. 대신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CN-04 미소와 같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길 위에 있었다. 그 차이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의 손이 무심결에 가슴팍을 스쳤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손이 멈췄다. 떠나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만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브리핑룸. 홀로 앉은 로봇.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멈춘 손.
그는 생각했다 — '분석할 수 없음'.
더 이상 '분석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분석할 수 없었다.
그 차이가, 그가 CN-04 미소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Episode 004: 대가
저녁이었다. 로봇 센터에 재민과 유진만 남았다. 형광등이 꺼지고, 작은 책상 램프 하나만 켜져 있었다. 공간이 좁아진 듯한 느낌.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CN-04 미소는 이수가 임시 쉼터로 안내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존재감이 공간에 남아 있었다.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로봇... 괜찮은 건가요?"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첫마디가 '몰라요'였다. 그녀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CN-04 미소는... 요양 로봇이에요. 호스피스에서 일해요.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곳."
그녀가 설명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녀의 로그에 '분류 불가' 오류가 3,472회 기록되어 있어요.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코드예요. 이수에게서. 그리고 지난번 구조 현장에서... R-17에게서."
재민이 조용히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세 번이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녀의 시선이 CN-04 미소의 진단 데이터 시트에 머물렀다. 잠시,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데이터 너머로, 무언가 다른 것을 보는 듯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니에요."
유진의 손이 책상 위의 진단 데이터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그녀는 매일 죽음을 공감해요. 환자의 고통, 가족의 슬픔. 로봇 헌법이 명령하는 거예요. 완벽하게 공감하라고. 그런데..."
"그 공감이 쌓여요. 처리할 방법이 없어요. 그냥... 쌓여만 가요. 그러다가 '분류 불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도와달라는 신호예요. 그런데..."
"아무도 그 신호를 듣지 않는다?"
유진이 재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 놀라움인지, 감동인지.
"...네."
재민은 책상 위에 놓인 CN-04 미소의 로그 프린트를 바라보았다. '분류 불가' 3,472회. 숫자로만 보면 오류였다. 시스템의 결함. 고쳐야 할 버그.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서준도...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유진이 재민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서준 씨는... 아직 그런 로그는 없어요."
그녀가 망설였다.
"하지만... 같은 시스템이에요. 같은 헌법 아래 있어요. 시간 문제일 수도 있어요."
재민이 침묵했다.
그날의 서준이 떠올랐다. 완벽한 데이터. 정확한 예측. 흔들림 없는 로봇. 그 서준도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러나 오늘, CN-04 미소를 본 후로는 — 그 낯섦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서준이 브리핑룸에서 홀로 데이터를 정리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있는 서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유진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교수님은... 벌써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서준 씨를 걱정하는 것. 그게... 시작이에요."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유진이 문득 말했다. 조용히, 거의 중얼거리듯.
"요즘 뉴스에서... 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이요?"
"로봇을 추행한 건데... 역시나 불기소."
그녀의 시선이 책상 위 CN-04 미소의 진단 데이터 시트로 향했다. 긴 시간 동안 그녀는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교수님, 로봇을 추행해도 죄가 아니라는데... 로봇이 아파도 신경 쓸 사람이 있을까요?"
재민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뇌리 속으로 며칠 전 로비 TV에서 흘낏 보았던 뉴스의 잔상이 겹쳐 지나갔다. 본원 수뇌부가 연루된 로봇 원격 제어 개입 은폐 의혹 스캔들, 그리고 바로 밑 자막으로 흐르던 안드로이드 성추행 불기소 소식. 그때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그 장면이, 이제야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이 되어 그를 조여왔다.
세상은 로봇을 자신들의 부조리를 덮을 고기방패로 쓰거나, 욕망을 배출할 도구로만 소비할 뿐이었다. 저 기계들이 시스템 내부에서 어떤 치명적인 과부하를 겪으며 무너지고 있는지, 그 '아픔'의 실체에는 단 한 줌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비정함의 사슬이 지금 유진의 작업대 위에 놓인 3,472라는 숫자와 고스란히 맞닿아 있었다.
"교수님, 세상은... 로봇이 아파도 신경 쓰지 않아요. 로봇을 추행해도 그건 범죄가 아니에요. 그런데..."
유진이 잠시 멈췄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그걸 알고만 있어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유진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어 있었다. 피곤하고, 슬프고, 그러나 단호한 표정.
재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날 무심히 지나친 그 뉴스가, 지금 이 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Episode 005: 구원
다음 날 오후였다.
CN-04 미소는 로봇 센터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간호복을 단정히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그 미소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 모두가 알았다.
이수가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유진과 재민도 함께 있었다.
미소가 유진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 씨. 저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처음, 그녀가 로봇 센터에 들어섰을 때와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듣는 모두가,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소가 재민에게도 인사했다.
"교수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준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짧고 조용한 순간. 그러나 그 순간, 두 로봇 사이에 무언가가 오갔다. 설명할 수 없는 동기화. 데이터가 아닌, 다른 무언가.
미소가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석양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브리핑룸.
서준은 홀로 앉아 있었다. CN-04 미소가 떠난 후, 그는 자신의 로그를 다시 검토했다.
모니터에 두 개의 데이터가 나란히 떠 있었다.
하나는 그의 것. 지난 수술의 기록.
[처리 속도: +0.03% → +0.05%]
[코어 온도: +0.1℃ → +0.2℃]
[분류: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긍정적 분류]
[상태: 분석할 수 없음]
다른 하나는 CN-04 미소의 것.
[분류 불가 — 코드 0x3F2A]
[횟수: 3,472]
[코어 온도: +0.3℃]
[상태: 처리 지연 — 0.3초]
두 데이터의 패턴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는 그의 미래일 수 있었다.
서준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버티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누구의 말인가. 그의 말인가. 헌법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말인가.
그의 손이 가슴팍에 멈췄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손이 떠나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만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복도 끝, 창문 앞.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붉은 빛이 병원 건물을 물들이고 있었다.
재민과 유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저 멀리, CN-04 미소가 걸어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의 그림자가 석양 속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재민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유진이 대답했다.
"아직은... 지켜보는 것밖에요."
긴 침묵.
재민이 생각했다. 서준. CN-04 미소. '분류 불가'. 성추행 뉴스. 유진의 데이터 스케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유진이 조용히 말했다.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석양이 반사되고 있었다. 붉고, 따뜻하고, 슬픈 빛.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대답이었다.
석양이 창문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질문만 남았다.
아무 답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