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08: 입장
Episode 001: 제안
아침 7시. 한국대학병원 1층 로비.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게시판 앞에 모인 흰 가운들이 무언가를 읽고 있다. 누군가 고개를 젓고, 누군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이를 지나려던 재민이 발걸음을 멈췄다. 게시판에 붙은 공지가 눈에 들어왔다 —
「김도훈 교수, 수술 집도 중단 및 중징계」
— 숨을 삼켰다. 어제의 브리핑이 기다렸다는 듯 울려 퍼졌다. 김도훈의 목소리, 책임 전가, 그리고 자신이 제출한 로그 데이터. 그 모든 것이 이 공지로 끝났다.
"로봇 때문에 그런대."
"아니, 김도훈 교수가 데이터를 조작했대."
"근데 로봇이 경고했는데도 수술을 강행했다면서?"
속삭임이 재민의 귀를 스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 사이를 지나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발견했다.
"강 교수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렸다. 속삭임이 멈췄다. 몇몇 얼굴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시선들이 — 기대인지, 의문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시선들이 — 그를 향했다.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자신도 그 침묵의 공범자였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수술 전 회의 — 그때 말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기회를 놓쳤다. 아니, 놓친 척했다.
그 차이가 지금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병원장 비서였다.
— 강 교수님, 병원장님이 오전 8시에 뵙자고 하십니다.
재민은 화면을 응시했다. 병원장이 왜 자신을 부르는가. 공지 후 첫날, 병원 분위기가 가장 어수선한 시간에.
답장을 쓰는 손이 잠시 멈췄다.
—
병원장실 문은 무겁게 느껴졌다. 재민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현수 병원장이 창가에 서 있었다. 넓은 책상 너머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이 방은 항상 결정을 내리는 방이었다. 아버지도 이 방에 서 본 적이 있을까. 재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강 교수, 수고 많았습니다."
병원장이 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때의 그 특유의 어조였다.
"김도훈 교수 건, 잘 처리하셨습니다."
재민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앉으시죠."
재민이 소파에 앉았다. 병원장이 맞은편에 앉으며 두 손을 모았다.
"국회에서 추가 로봇 도입 제안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서준 씨의 데이터로 우리 병원의 성과를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이 서준 씨와 가장 잘 협력했으니까."
재민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움츠러들었다.
"……서준 씨의 데이터를 사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병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 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해 주십시오. 실패율 0%에 가까운 안드로이드 의사. 그게 우리 병원의 경쟁력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재민은 침묵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병원장의 논리는 분명했다 — 로봇은 도구다. 더 많이 쓰면 병원이 산다. ACE의료원을 따라잡을 기회다. 김도훈 사태로 흔들린 병원의 이미지를 회복할 카드다.
"국회에서는 대부분이 찬성 분위기입니다. 기본소득 인상의 기회로 보는 거죠."
병원장의 말이 계속되었지만, 재민의 귀는 점점 멀어졌다.
서준의 데이터. 협력의 데이터. 서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수술들. 그 데이터가 확대파의 논리를 위해 사용된다. 서준을 '도구'로 증명하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
"강 교수?"
재민이 정신을 차렸다. 병원장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병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준비되면 연락 주십시오."
—
재민이 병원장실을 나섰다. 복도에 유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재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내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재민이 잠시 멈췄다.
"추가 로봇 제안 발표를 준비하래. 서준 씨 데이터로."
유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왜 교수님이 하죠?"
재민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이용하는 거야. 서준이와의 협력 성과를 — 확대파의 논리로 포장해서 국회에 제출하라는 거지."
유진이 잠시 생각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몰랐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아니, 무엇이 옳은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옳은 길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유진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기술팀에 있을게요. 필요하시면…… 같이 고민할게요."
그녀가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재민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혼자 남은 복도. 재민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이 차가웠다.
선택해야 한다.
Episode 002: 절망
재민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성모 과장실로 향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울 때 그는 항상 이성모를 찾았다. 스승은 언제나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질문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이성모의 과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이성모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라."
재민이 들어서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모는 돌아보지 않았다. 재민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병원장한테 불려 갔더라?"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 로봇 제안 발표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성모가 짧게 웃었다. "그 늙은 여우. 벌써 움직이네."
그가 일어났다. 낡은 가운을 벗어 걸며 말했다.
"옥상에 좀 올라가지. 이야기하기엔 여기가 너무 좁다."
—
옥상은 차가웠다. 병원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시야가 시멘트 바닥 위로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거셌다. 이성모가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민이 그 옆에 섰다.
이곳은 낯설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시계를 바라보며 독백했다.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그로부터 몇 달, 그는 확실히 변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성모가 입을 열었다.
"봤느냐? 김도훈이 한 짓을."
재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모가 계속했다.
"데이터를 조작하고, 책임을 로봇에게 전가하고. 그리고 병원장은 그걸 이용해 로봇을 더 늘리겠다고 한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차분했다.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무거웠다.
"너는 생각하겠지. '문제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다'라고."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이성모가 정확히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재민아 — 인간의 탐욕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긴 침묵. 바람만 불었다.
"역사가 증명한다. 통제는 항상 실패했다. 탐욕스러운 자들은 언제나 법의 구멍을 찾아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성모가 몸을 돌려 재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재민을 똑바로 응시했다.
"로봇이 통제 불가능한 게 아니다, 재민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인간이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재민은 숨을 삼켰다.
"너 같은 사람이 세상을 이끌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병원장, 김도훈 같은 자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안드로이드가 늘어날수록 대다수 인간은 더 나태해진다. 기본소득 받고, 로봇이 일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게 네가 원하는 미래냐?"
재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성모가 조용히 덧붙였다.
"휴머노이드만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안드로이드가 필요하지 않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없애야 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 끝났다. 바람 소리만 남았다.
재민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스승의 말은 무거웠다. 그의 논리에는 일리가 있었다. 아니, 너무나 일리가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탐욕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도, 김도훈도, 병원장도 — 모두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선생님……"
재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간은 통제 불가능합니다. 병원장님도, 김도훈 교수도, 저도…… 모두 각자의 탐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그 결론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성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로봇을 없애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긴 침묵.
이성모가 재민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네 아버지도 그랬다. 모두가 옳지 않다고 말할 때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갔지."
그가 난간에서 몸을 뗐다.
"나는 곧 은퇴한다. 이 병원에서 내 할 일은 끝났어."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재민아 — 네가 선택한 길이 험난할 거라는 것만은 기억해라. 아무도 너를 지지하지 않을 테니까."
이성모가 옥상 문으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차가운 시멘트 위에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재민은 혼자 남았다.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의 시계를 품은 손 끝이 차가웠다.
그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Episode 003: 선택
저녁, 로봇 센터.
형광등 불빛 아래 모니터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터 케이블이 바닥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기계음이 낮게 울리고 있었다.
재민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진이 서준의 로그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수가 조용히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수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조용했다. 기계음 같은 발걸음.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재민이 들어섰다. 이수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성모 선생님을 만났어."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재민이 잠시 멈췄다.
"로봇은 없애야 한다고. 인간이 통제 불가능하니까."
유진이 조용히 말했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재민이 대답하지 못했다.
유진이 기다렸다. 이수도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렸다. 로봇 센터의 기계음만이 낮게 울렸다.
—
유진과 재민이 마주 앉았다. 이수가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만 남았다. 모니터 불빛이 그들 사이의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로봇 헌법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로봇 헌법은 로봇을 보호하는 법이 아니에요. 로봇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법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제2조 — '존중·공감 의무'. 로봇은 인간을 존중해야 하지만, 인간은 로봇을 존중할 의무가 없어요. 인간이 로봇에게 잘못해도, 그것은 '죄'가 아니라 '손해'일 뿐이에요."
유진이 엔터 키를 세게 내리쳤다. 스크린에 복잡한 법조문 체계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 모순은 현장에서 그대로 괴물이 돼요. 이른바 '로봇 헌법'의 치명적인 구멍이죠. 로봇의 실시간 위험 분석과 경고는 '권고 사항'으로만 치부되고, 최종 결정은 오직 '인간의 권한'이라는 구속 하에 예속돼요. 김도훈 교수가 서준 씨의 수많은 경고 로그를 클릭 한 번으로 손쉽게 묵살하고 덮어버릴 수 있었던 법적 방패막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그녀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안드로이드가 초당 수천 번을 연산해서 진실을 말해도, 인간의 오만한 권리가 법의 이름으로 그것을 차단하고 묵살하도록 허용하는 한, 이 비극은 절대 멈추지 않아요."
재민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저는 생각해요. 로봇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인간이 로봇을 도구로 대하는 것을 법이 강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상호 존중이 필요해요. 그게 진정한 공존의 전제라고."
그녀의 말이 끝났다. 침묵.
재민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쳤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아니, 몇 달 전 로비 TV에서 그 뉴스를 봤어요."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로봇 성추행 사건. 나는 그냥 지나쳤어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건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요."
유진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로봇을 도구로 보는 시선, 로봇을 사물로 취급하는 법, 인간이 로봇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 — 그 모든 것이 그 뉴스에서 시작됐어요. 나는 그걸 지나쳤어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죠."
재민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맺혔다.
"근데 그게 내 문제였어."
"서준 씨가 도구로 취급당한 것도, 김도훈 교수가 데이터를 조작한 것도, 그 모든 게 '로봇은 도구일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거였어.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도 그렇게 행동했어. SR3호라고 부르면서, 서준 씨를 도구처럼 대하면서."
—
긴 침묵이 흘렀다.
유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들어서."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생각합니다. 로봇 헌법이 문제라고. 서준 씨는 도구가 아니었어요. 존재였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를 도구로 취급했어요. 로봇 헌법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어요."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 인간은 통제 불가능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로봇을 없애는 게 답은 아니에요."
"우리가 바뀌어야 해요. 로봇을 도구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존재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의 입장이네요."
재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아무도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병원장은 확대파고, 선생님은 철폐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소득이나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유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
형광등이 꺼졌다. 모니터 불빛만 남았다.
재민과 유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수가 돌아와 조용히 데이터를 정리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Episode 004: 입장
브리핑룸이 가득 찼다. 각 과의 과장들, 간호부장, 기술팀.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긴급 회의 — 김도훈 사태 이후 병원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재민은 뒷자리에 앉았다. 유진이 기술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성모는 앞줄에 앉아 있었고, 병원장은 이미 연단에 서 있었다.
재민의 시선이 브리핑룸을 훑었다. 형광등의 윙윙거림. 익숙한 소리였다. 서준과 첫 대면한 이곳. 데이비드 수술의 협력을 논의한 이곳. 김도훈이 책임을 전가한 이곳. 같은 공간, 다른 순간들.
뒷자리에서 한 간호사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박지영 수간호사.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병원장이 연단에 섰다.
"먼저, 김도훈 교수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개인의 잘못이지, 로봇 시스템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위에서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장이 계속했다.
"저는 오히려 이 기회에 우리 병원의 로봇 시스템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R-03의 데이터가 증명합니다 — 로봇은 정확하고, 피로하지 않으며, 인간의 실수를 보완합니다."
——
"잠시만요, 병원장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성모 과장이 손을 들고 일어서고 있었다.
"저는 반대합니다."
브리핑룸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성모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로봇이 통제 불가능해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브리핑룸을 둘러보았다.
"인간이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겁니다."
병원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김도훈이 왜 데이터를 조작했습니까? 로봇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탐욕은 결코 통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안드로이드가 늘어날수록, 인간은 더 나태해지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더 교묘해집니다."
"휴머노이드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안드로이드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브리핑룸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메모했다. 박지영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있었다.
병원장이 차분하게 응수했다.
"과장님의 우려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합시다. ACE의료원은 우리보다 4대나 더 많은 로봇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수술 성공률은 우리보다 15% 높습니다."
"우리가 따라잡지 않으면 이 병원은 도태됩니다."
"국회에서도 추가 로봇 도입에 찬성하는 분위기입니다 — 기본소득 인상의 기회로 보는 거죠."
이성모가 대꾸하려 했지만, 병원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오늘은 논의만 하고, 결정은 추후에 하겠습니다."
—
브리핑이 끝났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민은 복도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병원장의 말, 이성모의 말, 유진과 나눈 대화가 교차했다. 모든 입장은 각자의 논리를 가졌다. 어느 것도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
그때.
"강 교수님."
고개를 드니 박지영 수간호사가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시선은 묘하게 단단했다.
"진료실에서 크게 싸우셨다면서요? 선생님들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리던데."
재민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답하려 하자,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을 가로챘다.
"근데 교수님, 솔직히 로봇 철폐니 뭐니 하는 소리, 현장에서는 정말 배부른 소리로 들려요."
"네?"
"병원장님 말씀대로 로봇 도입 한도 늘어나서 국가에서 기본소득 더 나오면, 그게 다 우리 같은 서민들, 간호사들 생계에 직접 보탬이 되는 거잖아요. '로봇이 늘면 기본소득도 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왜 자꾸 위에서 도덕 책 같은 소리 하면서 발목을 잡나 싶죠."
박지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이기심. 그러나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일상의 무게가 담긴 말이었다.
"저는 정치는 몰라요. 그냥 수술실이나 잘 챙기려고요. 교수님들이 무슨 거창한 토론을 하시든, 제 할 일은 환자 안 죽고 수술 잘 끝나는 거니까요."
그녀의 말은 서늘할 정도로 실용적이었다.
그녀가 돌아서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근데…… SR-03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 로봇,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애처럼 종일 서 있더라고요. 저희 간호사들도 걔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는 건 다 느껴요. 도구 취급하면서 괴롭힐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없애버리겠다니…… 걔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녀가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냉소와 온정의 교차 속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그날 로비 TV의 뉴스를 무심코 지나치던 자신을.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는 이미 선택했다.
—
다음 날. 재민이 다시 병원장실로 호출되었다. 유진도 함께였다.
병원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여전히 완벽하고 부드러운 미소.
"수고하셨습니다. 어제 회의 내용, 들으셨죠?"
재민과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회에서 추가 로봇 도입 제안을 발표할 겁니다. 강 교수님, 당신이 서준 씨의 데이터로 우리 병원의 압도적인 성과를 발표해 주십시오. 유진 씨는 그를 뒷받침할 기술적 성공 데이터를 빈틈없이 준비해 주시고."
병원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절대적인 권력의 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
재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망설임은 지워져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병원장의 눈을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병원장님. 준비하겠습니다."
유진 역시 눈빛을 단단히 굳히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완벽한 데이터를 들고 국회로 가겠습니다."
병원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준비되면 연락 주십시오."
—
재민과 유진이 병원장실을 나섰다. 복도.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멀어지는 병원장실 문을 등진 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유진이 재민의 손을 살짝 쥐었다. 그 손끝을 통해 뜨겁고 날카로운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병원장은 믿고 있을 것이다. 이 유능한 젊은 의사와 기술자가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해 줄 화려한 전사가 될 것이라고.
그러나 두 사람의 눈빛은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빛 아래서 무섭도록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국회 단상 위에서 터뜨릴 것은 병원장이 원하는 포장된 성과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은 로봇 헌법의 비대칭적 모순, 로봇 한도법의 비겁한 맹점, 그리고 김도훈의 탐욕과 시스템이 은폐하려 한 '진실의 데이터'였다.
재민이 멈추지 않고 걸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거대한 서울 도심의 불빛들이 가닥가닥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가 국회 단상 위에서 무슨 말을 던질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