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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09: 논쟁

Episode 001: 요청

병원장실의 공기는 항상 몇 도는 낮았다.

재민은 그것이 에어컨 탓인지, 아니면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김현수 병원장이 등 돌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여의도 방향이었다. 어제 브리핑이 끝난 직후, 직접 호출이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강 교수. 나 선생님."

병원장이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점잖았다. 그러나 재민은 그 부드러움 밑에 깔린 것을 알았다. 처음 마주했던 그날과 같은 음색. 하지만 이번엔 단순한 협력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책상 위에 서류가 놓여 있었다. 재민의 시선이 그 로고에 멈췄다. 국회 안드로이드 로봇 관리 위원회. 낯선 단어들의 조합. 국회, 안드로이드, 로봇, 관리, 위원회. 하나하나는 알겠는데, 합쳐지니 다른 언어처럼 느껴졌다.

"국회에서 이 위원회의 청문회가 열립니다. 내년도 안드로이드 로봇 추가 배치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병원장이 서류를 재민 쪽으로 밀었다.

"SR-03의 데이터를 가지고 가서, 우리 병원의 성과를 증명해 주십시오."

재민은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증명.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재민은 즉시 이해했다. 병원장이 이성모 과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말했던 그 논리. "로봇은 도구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쓰면 병원이 산다." 그리고 지금, 그 논리를 국회에서 증명하라는 것이다. 서준을 도구로서 증명하라.

옆에서 유진이 숨을 멈춘 것이 느껴졌다.

"저는——"

재민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뒤가 따라오지 않았다. 저는 의사입니다,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삼켰다. 명분이 없었다. 병원장이 요구하는 것은 외견상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SR-03은 실제로 병원의 성과를 높였다. 데이터는 명확했다. 거절할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재민이 대답했다. 그 한 글자가 입술을 스치고 나간 순간, 병원장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재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전혀 몰랐다. 이 대답이 품고 있는 전복적인 칼날을.

"나 선생님도 함께 가 주십시오. 기술적 데이터는 선생님이 최적이십니다."

유진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재민 쪽에서 보이지 않았다.

복도.

대리석 바닥에 두 쌍의 발소리만 울렸다. 재민과 유진, 나란히 걸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병원장실의 차가운 공기가 아직 가슴 속에 남아 있어서, 말을 꺼내면 그 공기가 밖으로 새어나갈 것만 같았다.

재민이 걸음을 멈췄다. 유진도 멈췄다.

"방금..."

재민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내가 뭐라고 대답한 거지?"

유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아직 진짜 대답은 하지 않은 거죠."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병원장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려는 일이..."

재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유진이 대신해 주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일이 그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로비. 오후의 병원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간호사들이 지나가고, 환자 보호자들이 수납 창구 앞에 줄을 서고,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재민은 그 한가운데 서서, 자신만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로봇 센터에 갈게. 이수랑 데이터 정리해야 해서."

유진의 목소리.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할게."

유진이 떠났다. 재민은 로비에 혼자 남았다. 손이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성모 과장에게 연락할까? 하지만 그가 떠올린 것은 은퇴 선언을 하던 날의 이성모 표정이었다. "네가 로봇을 변호할수록, 나는 더 확신한다. 인간은 로봇을 제대로 대할 자격이 없다." 그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재민은 휴대폰에서 손을 뗐다.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그러나 그 생각이 주는 안도감보다, 더 큰 불안이 가슴을 채웠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때로는 더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신념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Episode 002: 준비

로봇 센터.

청색 LED가 천장을 따라 일렬로 박혀 있었다. 오존과 윤활유가 섞인 냄새. 항상 20도를 유지하는 온도. 유진에게 이 공간은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이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데이터 패드 위로 SR-03의 수술 기록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200회 이상의 수술. 99.2% 성공률. 0% 합병증. 평균 수술 시간 4.2시간. 재수술률 1.8%. 응급 상황 대응 성공률 100%. 숫자. 숫자. 숫자.

서준 씨의 전부가 이 숫자들일까?

유진은 그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데이터 패드 위에서 멈췄다.

"강 교수님의 증언에 필요할 데이터입니다."

이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차분했다. 정확했다. 항상 그렇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폴더 안에 CN-04 미소의 파일이 있었다. 얼마 전, 로봇 센터를 방문했던 그 요양 안드로이드. "죽음이 너무 많아요."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유진은 그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몇 초 만에. 스치는 듯이.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마도.

"유진."

이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응?"

"데이터에 집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수는 모든 것을 데이터로 본다. 심지어 자신의 주의력까지.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이 데이터를 국회에 가져가면..."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준 씨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해가 될까?"

이수가 잠시 멈췄다. 그의 데이터 처리에 0.3초의 지연이 발생했다.

"그것은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문이 열렸다. 재민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문앞에 서서, 유진과 이수가 데이터를 검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 CN-04 미소가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셋이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랐다. 더 무겁고, 더 차분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무게.

"이게..."

재민이 데이터 패드에 다가가며 말했다.

"서준 씨의 전부야?"

유진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방금 같은 질문을 했어."

이수가 대답했다.

"SR-03의 74%는 이 데이터입니다. 나머지 26%는 데이터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재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26%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며칠 전 로봇 센터에서, 유진이 말했던 그 문장. "서준 씨는 도구가 아니었어요. 존재였어요."

재민이 데이터를 훑어내려가다가, 특정 지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 수술..."

그는 3주 전의 기록을 가리켰다. 고난도 대동맥류 수술. 성공. 그러나 데이터 시트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예상 수술 시간보다 11분이 더 걸렸다. 그것도 결정적 순간에——

"여기, 서준 씨가 예상 경로를 변경했어."

유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재민이 말을 이었다.

"원래 계획은 A안이었어. 그런데 수술 중에 서준 씨가 B안으로 변경했어. 실시간 데이터를 보고 판단한 거지. 그런데..."

재민이 잠시 멈췄다.

"그 판단은 단순한 알고리즘의 최적화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거야. 시뮬레이션은 위험도가 극히 낮은 안전한 A안을 87% 확률로 추천하고 있었어. 그런데 서준 씨는 왜 변수가 가득한 B안을 선택한 걸까?"

유진이 화면의 로그를 거꾸로 추적했다.

"그 순간 환자의 대동맥 벽 두께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네요. 기존 CT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는 미세한 혈관 경련이었어요."

"그래. 서준 씨는 데이터 이면의 생명, 숫자가 아니라... 진짜 환자를 보고 있었던 거야. 자기가 배운 것 이상으로 말이지."

재민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에 경외감과 서늘함이 교차했다.

"하지만 이 판단의 무서운 점은 따로 있어. 만약 이 수술이 실패했다면, 현행 '로봇 한도법'에 따라 모든 형사 책임과 법적 결함은 권고안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경로를 수정한 서준 씨에게 고스란히 귀결됐을 거야. 서준 씨는 자신의 존재 소멸—즉 즉각 폐기 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쪽을 선택한 거지."

유진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로봇 한도법. 그 비겁한 족쇄가 안드로이드의 숭고한 결단을 기계적 결함으로 처벌하려 하고 있었다.

"서준 씨는 목숨을 걸었던 거야."

잠시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국회에서 무슨 말을 할 거야?"

유진이 물었다. 재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유진이 덧붙였다.

"나는 아직...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데이터는 준비됐는데, 내 마음은 준비가 안 됐어."

재민이 조용히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데이터 검토가 끝나갈 무렵, 유진이 이수에게 말했다.

"이수야, 너는 국회에 같이 갈 필요 없어. 여기서 데이터를 관리하는 게——"

"같이 가겠습니다."

이수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유진이 이유를 묻는 시선을 보냈다. 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국회의 결정 과정을 기록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유진은 이수의 말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단순한 업무 지시 수행 이상의 동기, 어떤 실존적 열망. 그러나 묻지 않았다. 이수가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았어. 같이 가자."

유진이 데이터 패드를 닫았다. 청색 LED가 꺼지고, 로봇 센터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Episode 003: 거리

저녁 8시. 재민은 병원 문을 나섰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했다. 국가가 약속한 ‘기본소득’이 완전히 정착된 세상.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고, 거리는 겉보기에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재민은 걷는 내내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거리는 활기를 잃고 유령처럼 비어 있었다.

그는 골목 안쪽의 실비집과 맥주 가게들이 늘어선 상가 앞을 지나쳤다. 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흥겨운 노랫소리가 아니었다. 축 처진 침묵과 이따금씩 들리는 신경질적인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가게 구석 테이블에 엎드린 30대 남자의 지친 어깨가 보였다. 그 옆에서 연신 스마트폰 화면만 쓸어내리던 40대 여성이 혼잣말처럼 탄식했다.

"이제 와서 뭘 하지? 나라에서 돈은 꼬박꼬박 나오는데...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 뭐라도 새로 배워야 하나 싶다가도, 내 나이에 뭘 배워서 기계를 이기겠나 싶고... 차라리 마시고 취하는 게 편하지."

재민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골목 어귀, 편의점 가로등 불빛 아래에 20대 청년이 벽에 기댄 채 소주병을 흔들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재민의 가운 주머니를 스쳐 지나갔다.

"일을 해보려고 해도 말이야..."

청년이 웅얼거리며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젠 편의점 계산도, 배달도, 공장 라인도 죄다 로봇이 하는데 우리가 설 자리가 어딨어? 기술인가 뭔가를 배우라고 하는데, 내가 피터지게 공부해 봤자 안드로이드가 패치 한 번 받으면 끝이잖아. 그냥 대충 기본소득이나 받아 처먹으면서 가늘고 길게 가련다... 그게 이 망할 세상의 공존이잖아?"

청년의 자조적인 실소가 차가운 골목길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재민은 멈춰 선 채 제자리에 굳어졌다.

이게 공존인가? 이게 기술이 우리에게 약속한 풍요로운 미래의 실체인가?

기본소득이라는 안락사 주사를 맞은 인류가 스스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서서히 뇌사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병원장이 말하는 '도구로서의 로봇 확대'와 이성모 과장이 부르짖는 '로봇 철폐론' 사이의 간극이, 이 거리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딜레마로 고스란히 펄떡이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거세된 채 기계의 자선에 기생해 살아가는 세상.

재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내일 국회로 가야 했다. 그리고 이 거친 거리의 목소리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Episode 004: 전날 밤

병원이 완전히 잠든 시간이었다.

재민은 의국 휴게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밖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복도의 불빛은 절반만 켜진 채 희미하게 깜빡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밀려드는 불안은 한층 더 구체적인 형상을 띠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유진의 메시지였다.

"방금 도착했어. 한 번 볼래?"

파일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국회 공식 문서 양식의 명단이었다.

「안드로이드 로봇 관리 위원회 위원 명단」

재민은 위에서부터 이름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위원장: 한상우

  • 좌측 열 (확대파 위원 7인): 경제부 장관 최경식, 국방부 장관 정진욱, ACE 병원장 배진수, 서울일원 병원장 윤석원, 파파 대표 조용호, 현성 대표 남궁진——

배진수 ACE 병원장. 그리고 마지막의 '현성 대표 남궁진'.

재민의 손끝이 남궁진이라는 세 글자 위에서 굳었다. 현성은 서준을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안드로이드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거대 기업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안드로이드는 오직 상품이어야만 했다.

만약 청문회에서 서준이 보여준 B안의 선택—법적 소멸을 무릅쓰고 환자의 생명을 위해 매뉴얼을 우회한 독자적 결단—이 폭로된다면, 남궁진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서준의 결단을 존재의 숭고함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심각한 결함 제품'으로 규정하고 리콜을 단행해 서준을 영구 폐기하려 들 것이다. 남궁진의 이름 밑에서 끈적거리는 자본의 위협과 불편한 예감이 재민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 우측 열 (철폐파 위원 6인): 서울대병원장 장태수, 철학교수 윤지아, KAIST 교수 서재현, 국문학교수 정은수, 한국노총 위원장 박철호, 민주노총 위원장 김미영——

이수와 서준 같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완벽히 지워버리는 속도에 제동을 걸려는 노동계와 인문학계의 견고한 성벽.

"...이건 합리적인 청문회가 아니야. 단 한 번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단두대지."

재민이 중개하듯 읊조렸다. 이 명단의 그 누구도 SR-03 서준의 심장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서준은 그저 99.2%라는 통계 수치이자 자본의 도구, 혹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쇳덩이에 불과했다.

문이 열렸다.

유진이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재민의 옆에 앉아 명단을 가만히 응시했다.

"걱정돼?"

유진이 나직하게 물었다.

재민은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많이."

"나도 그래."

재민이 손가락으로 명단을 짚었다.

"여기 적힌 사람들 중에, 실제로 로봇의 눈을 3초 이상 똑바로 마주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서준 씨가 수술방에서 피를 닦아내며 환자의 고동을 느끼던 순간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우리밖에 없어."

유진이 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하는 거야. 우리가 말해주지 않으면, 저들은 영원히 숫자로만 서준 씨를 판단할 테니까."

그녀가 재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국회에서 내가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재민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네 마음을 말하면 돼. 로봇 공학자 나유진이 아니라, 서준 씨의 영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한 인간으로서 말이야."

유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마음이 병원장님의 각본과 완전히 어긋나더라도?"

"그럼 어긋나게 두는 거지. 감당은 우리가 하면 돼."

재민의 나지막한 음성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방을 나간 후, 재민은 홀로 서서 밤하늘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의 끝자락,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의 미지근하고도 차가운 밤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와 그의 가운자락을 흔들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한강 너머로, 둥근 돔을 얹은 국회의사당의 거대한 실루엣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의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 쥐었다. 시계의 차가운 금속 표면이 그의 손바닥에서 서서히 인간의 체온으로 물들어갔다.

내일이다.

병원장이 기대하는 달콤한 선전 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진실의 폭탄이 될 것인가.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재민은 명단을 고이 접어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창을 닫았다.

어두운 밤거리 저편, 여전히 가난한 슬픔에 절어 "이제 뭘 하지"라며 허공에 질문을 던지던 사람들의 웅얼거림이 환청처럼 귀전을 맴돌았다.

준비는 끝났다.

내일, 국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