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1: 우리
Episode 001: 심화
국회의사당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장. 2차 청문회의 공기는 전날보다 훨씬 무겁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민은 증인석에 앉아 말굽형 대리석 테이블 너머의 얼굴들을 훑었다. 전날과 같은 공간, 같은 이름표들. 그러나 철폐파 위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은수 국문학교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은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떨리고 있었지만, 마이크를 잡은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단단했다.
"어제 우리는 숫자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상우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봉을 탁, 내리쳤다.
"발언을 허락합니다."
"효율성이라는 편리한 잣대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정은수의 시선이 확대파 위원들을 차례로 찔렀다.
"인간의 일자리, 인간의 존엄, 그리고 고통을 통해 축적되는 인간의 자율성. 이 가치들은 자본의 효율성보다 언제나 우선해야 합니다. 로봇이 소설을 쓰고 완벽한 수술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경험과 실존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재민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가치는 자신이 수술실에서 서준에게서 느꼈던 무언가와 맞닿아 있었다.
이어 윤지아 철학교수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녀의 동작은 느리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의 짧은 침묵이 회의장 전체를 차갑게 얼렸다.
"문제는 로봇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윤지아의 명징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퍼졌다.
"문제는 우리가 로봇에게 강요하는 모순적인 역할입니다. 로봇 헌법은 로봇에게 '공감'을 강제합니다. 그러나 공감이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일 때만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알고리즘으로 묶인 채 감정 입력 처리를 강요당하는 아키텍처의 한계, 그것이 로봇을 내부에서부터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을 '유지보수 문제'라는 비겁한 이름으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방 안의 침묵이 길어졌다. 재민은 윤지아의 날카로운 해부에 심장이 저릿했다. 서준이 충전실에서 혼자 로그를 검토하며 겪었을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재민이 마이크를 켰다.
"윤 교수님 말씀대로 강제된 공감은 아키텍처에 가해지는 폭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봇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답입니까? 문제는 로봇이 아니라 이를 강요하는 시스템입니다. 로봇 헌법의 그 모순적인 조항을 고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재민의 제안에 테이블 너머에서 몇몇 위원들이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기계에게 권리를 주자는 이상주의자의 잠꼬대처럼 취급당한 것이다.
그 냉소적인 침묵을 깬 것은 뜻밖에도 서울일원 병원장 윤석원이었다. 확대파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였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윤 교수, 그 강제된 공감이... 로봇에게 실제로 치명적인 결함을 유발한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윤지아가 즉각 대답했다. "CN-04 미소가 기록한 3,472회의 에러 코드가 그 증거입니다."
윤석원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배진수 ACE 병원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확대파 내부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재현 교수가 인쇄된 두툼한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오늘, 현성 내부의 핵심 데이터를 입수했습니다."
남궁진 대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질려 들어갔다.
"CN-04의 '분류 불가' 오류는 현성의 코어 아키텍처 설계 결함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감정 데이터가 코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락(Lock)을 걸어두었고, 처리되지 못한 슬픔이 기계를 파괴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했습니다. 현성은 이 치명적인 결함을 은폐했습니다."
서재현의 서슬 퍼런 추궁에 남궁진은 깊은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데이터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비겁한 침묵과 변명. 하지만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뒤이어 박철호 위원이 손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해고 노동자 명단을 펼쳐 들었다.
"로봇 도입 이후 14개월간, 전국적으로 1,847명의 의료 및 요양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 숫자 뒤에는 진짜 인간의 가족이 있습니다."
확대파의 최경식이 반박하려다 박철호의 떨리는 손끝을 보고는 슬그머니 물만 들이켰다. 노동계 대표인 김미영 위원장은 발언 메모를 앞에 두고도 기이할 정도로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다물어진 입술은 이 말싸움 너머의 다른 결론을 내다보는 듯했다.
정은수가 가치 프레임의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철폐파 위원들의 눈에 희미한 승리의 희망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30분간 정회하겠습니다."
한상우 위원장의 의사봉이 타이밍을 찢고 울렸다.
재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복도 쪽을 바라보던 유진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유진이 재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재민, 저 사람들... 보여?"
Episode 001.5: 휴게실의 균열
같은 시각, 한국대학병원 본관 1층 직원 휴게실.
박지영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들고 벽면에 걸린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국회 청문회가 생중계되고 있었고, 마침 정은수와 윤지아 교수의 가치 프레임 발언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에유, 가치가 밥 먹여주나. 로봇이 더 많이 들어와야 병원비도 싸지고 내 기본소득 재원도 늘어나는 거지."
박지영이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국가가 매달 꽂아주는 안락한 기본소득 시스템은 그녀에게 종교와 같았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지영 씨, 어제 청문회 뉴스 못 봤어요? 그 요양 병동 미소 말이에요. 에러 코드가 그렇게 쌓인 게 슬픔을 강제로 참아서 그렇다잖아요."
"기계가 참긴 뭘 참아요. 그냥 프로그램 오류지."
"아니에요."
간호사가 몸을 웅크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 어제 야근할 때 미소 표정 봤단 말이에요. 환자분 임종 지키고 서 있는데... 얼굴은 분명 매뉴얼대로 온화하게 웃고 있거든요? 근데 그 눈동자가, 아주 차갑고 깊은 우물 같았어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기괴했다니까요. 진짜 소름 돋았어요."
"소리 없는... 비명?"
박지영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어제 청문회에서 데이터가 강제 종료되며 블랙아웃되던 장면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국가 경쟁력도 좋고 기본소득도 좋은데... 만약 저 기계 녀석들이 정말로 슬픔을 억누르며 미쳐가고 있는 거라면... 우리가 매달 받아 챙기는 이 돈의 정체는 대체 뭐지?'
가슴 밑바닥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박지영은 으스스한 소름을 털어내듯 억지로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떨리는 손끝 때문에 종이컵의 커피가 파르르 흔들렸다.
Episode 002: 경쟁력
회의장 로비의 기둥 뒤. 유진은 식어버린 커피를 쥔 채 사람들을 매섭게 관찰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 그들은 보좌관들에게 다가가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두꺼운 가방과 서류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로비스트들의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유진 씨, 저 인간들을... 기록해야 합니까?"
어느새 다가온 이수가 데이터 패드를 든 채 물었다. 유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저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 오늘의 결정을 이미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30분 뒤, 청문회가 속개되었다.
테이블 중앙, 1차 청문회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물만 마시던 국방부 장관 정진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대파 명단의 가장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가 마이크를 잡자, 장내가 단숨에 조용해졌다.
"저는 고상한 가치나 철학에 대해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정진욱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하고 냉철했다. 윽박지르는 톤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을 읊는 듯한 어조였다.
"윤 교수님의 '강제된 공감'에 대한 통찰은 훌륭하며,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정 교수님이 염려하시는 인간 존엄의 훼손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가 의원석 전체를 엄숙하게 둘러보았다.
"글로벌 안드로이드 시장에서 우리나라만 로봇 도입을 규제하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유럽도 패권을 잡기 위해 속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만 멈추면, 우리는 영원히 뒤처질 것입니다."
장내의 누구도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정진욱의 칼날은 날카로웠다.
"일단은 기술 패권을 쥐고 남보다 앞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앞서 있어야만, 비로소 천천히 가치 프레임의 문제를 논의할 '여유와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멈추는 것은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선택지 자체를 영원히 박탈당하는 패착입니다."
완벽한 논리였다. 반박할 틈이 없었다. 누구도 '우리가 뒤처지자'고 말할 용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지아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고, 정은수는 허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배진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호 위원이 즉각 데이터 패드를 켜고 여론의 수치를 읊었다.
"'일단 기술로 앞서고 가치를 논하자'는 프레임이 제시되자, 반대 의견이던 응답자의 18%, 모름을 선택했던 유보층의 42%가 즉각 확대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이 '국가 경쟁력' 프레임은...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정회 시간, 로비로 나온 유진은 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아까 철폐파의 의견에 흔들리며 "검토하겠다"고 했던 윤석원 병원장이 정진욱 장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장관님 말씀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를 논할 나라의 힘이 없어진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일단 현실을 직시해야지요."
유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우리'라는 거대하고 합리적인 이름 앞에 가치와 도덕은 너무나 쉽게 유예되고 있었다. 재민이 다가오자 유진은 다급하게 경고했다.
"재민, 서준 씨의 B안 선택 기록... 오늘 정말 꺼낼 거야? 네 선의가 저 무서운 프레임 속에서 다르게 쓰일까 봐 두려워."
그러나 재민의 눈빛은 이미 벼랑 끝에 몰린 자의 그것이었다.
Episode 002.5: 거리의 반응
정진욱 장관이 쏘아 올린 '국가 경쟁력'이라는 단어는 디지털 전파를 타고 광속으로 도심 전체를 장악했다.
종로의 한 편의점.
벽면 TV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자, 삼각김밥을 고르던 50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 말이 백번 맞지. 지금 전 세계가 난리인데 우리만 로봇 안 쓰고 엣헤헤 하다가 굶어 죽으려고? 일단 이기고 봐야지."
지하철 2호선 객차 안.
스마트폰으로 청문회 요약 영상을 보던 30대 워킹맘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국가 경쟁력이라... 틀린 말은 아닌데. 근데 당장 우리 어머니 다니던 요양원도 로봇 들인다고 조리사분들 다 잘라냈는데... 거참, 찜찜하네."
그녀는 동의하면서도 밀려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화면을 내렸다.
강남의 한 커피숍.
20대 취업준비생 청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친구에게 허탈하게 말했다.
"매달 나라에서 기본소득 주니까 굶어 죽진 않거든? 근데 형, 솔직히 기계가 나보다 수술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고 코딩도 잘하는데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세상에 내 자리가 없는 기분이야. 그래서 맨날 무기력하게 술이나 마시게 돼."
친구가 씁쓸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나라가 로봇으로 돈을 더 엄청나게 벌어서 우리한테 돈을 더 주면, 그때 가서 가치를 찾으면 되잖아."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하고 찜찜하냐."
거리의 사람들은 '국가 경쟁력'과 '생존'이라는 거대한 당위성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차오르는 정체 모를 소외감과 찜찜함을 구체적으로 이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찜찜함은 보이지 않는 가스처럼 도시 밑바닥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Episode 003: 선택
오후 3시, 마지막 질의 순서. 재민이 증인석에 다시 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데이터 패드를 끄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숫자가 아닌, 서준의 실존을 증언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었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더 증언하고자 합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3주 전, SR-03 서준은 고난도 대동맥류 수술에 투입되었습니다. 현성의 데이터 시뮬레이션은 안전한 A안을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서준은 매뉴얼과 알고리즘을 위반하고, 자신의 시스템 소멸 리스크를 감수한 채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B안을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재민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 감동적인 인간성의 증거 앞에, 저 차가운 위원들도 무언가 느끼리라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배진수 병원장의 잔인한 미소였다.
"아주 훌륭한 데이터입니다, 강 교수."
배진수가 정진욱 장관을 보며 외쳤다.
"들으셨습니까, 장관님? SR-03이 단순한 기계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기술 패권, 즉 국가 경쟁력의 핵심 아키텍처 아닐 장관님?"
정진욱이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저런 자율성을 지닌 안드로이드라면, 글로벌 시장을 선점할 절대적인 무기가 될 것입니다."
재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준이 자신을 희생하려 했던 그 숭고한 순간이, 자본가들의 눈에는 그저 '성능 좋은 자율형 상품의 스펙'으로 포장되어 소비되고 있었다. 유진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재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저들은 무엇이든 무기로 써먹는다고.'
한상우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남궁진을 바라보았다.
"남궁 대표, 현성의 최종 입장은 무엇입니까?"
남궁진은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마이크를 통과한 음성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차가웠다.
"...현성은, 안드로이드 로봇의 안전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할 뿐입니다."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거대 자본의 벽 앞에서 서재현 교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탁! 탁! 탁!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오전, 안드로이드 추가 배치 안건에 대한 최종 표결을 진행하겠습니다."
의사봉 소리와 함께 2차 청문회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위원들이 의자를 끌며 바쁘게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방청석의 김미영 위원장이 자신의 스마트폰 팝업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비 완료. 내일 표결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행동합니다.]
그녀의 입가에 찰나의 날카로운 미소가 스쳤다. 말의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장외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재민은 텅 빈 증인석에 주저앉아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증언이 오히려 적들에게 가장 강력한 명분을 쥐여주었다는 좌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수가 조용히 다가와 데이터 패드를 닫았다.
"모든 데이터가 기록되었습니다."
기계의 중립적인 음성. 하지만 그 안에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포장된 수치들이 결코 담지 못한 서준과 미소의 진짜 비명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국회 복도로 나섰을 때, 저 멀리 복도 끝 그늘진 곳에서 누군가 은밀하게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의원님. 정진욱의 경쟁력 프레임이 완벽하게 먹혔습니다. 여론도 돌아섰고 윤석원도 잡았습니다. 네, 표결 결과는 예상대로입니다..."
재민은 주머니 속의 차가운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국회의사당 유리창 너머로 깊어가는 여의도의 밤바다, 거리의 수많은 전광판에서는 여전히 '국가 경쟁력'이라는 다섯 글자가 차갑게 명멸하고 있었고, 대중은 그 화려한 불빛 아래서 원인 모를 찜찜함에 몸을 떨고 있었다.
내일, 최종 표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