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2: 결정
Episode 001: 표결
의사봉 소리.
아니—— 의사봉이 탁자에 닿기 직전, 회의장을 지배하던 찰나의 침묵.
공기가 수축하는 느낌 속에서 재민은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멈췄다. 10장의 그 치열했던 난타전과 11장의 정교한 프레임 전쟁이 남긴 찌꺼기들이 회의장 바닥에 진득하게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3일간의 청문회를 통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한상우 위원장의 목소리가 텅 빈 회의장을 무겁게 채웠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천장 에어컨의 미세한 진동음보다 낮았지만,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무게였다.
재민은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검지 끝이 땀으로 젖은 데이터 패드의 플라스틱 가장자리를 가만히 긁어내렸다. 패드의 차가운 촉감이 마비되어 가던 현실감을 억지로 붙잡아 주었다.
"이제—— 최종 표결을 진행하겠습니다."
의사봉이 내려앉았다.
쿵.
단단한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증폭되어 울렸다. 14명의 위원이 각자 앞에 놓인 투표 터치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재민은 먼발치에서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배진수 ACE 병원장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엷은 실금처럼 가 걸려 있었다. 최경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미리 정해진 답을 누르듯 지문을 댔고, 정진욱 국방부 장관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눈을 감았다.
반대편의 장태수 의원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마른세수를 했고, 윤지아 교수는 정면의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정은수 국문학교수의 검지 끝은 탁자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표결이 진행되었다.
단 몇 초의 시간. 그러나 재민에게는 심장이 정지한 영원처럼 느껴졌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마다 11장의 패배감이 목구멍을 칼날처럼 긁고 지나갔다.
한상우 위원장이 이윽고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를 읽었다.
"찬성 8, 반대 6. 가결되었습니다."
완벽한 침묵.
사형 선고를 받은 방처럼 누구도 쉽게 첫 움직임을 가져가지 못했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최경식이 가장 먼저 서류첩을 탁 닫으며 혼잣말처럼 뱉었다. 마치 오늘의 날씨를 읊조리는 목소리였다.
"예상된 결과입니다."
배진수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며 완전한 승자의 미소가 만개했다. 정진욱 역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선 승리의 기쁨보다 '마땅히 흘러가야 할 역사의 방향'을 확인했다는 듯한 오만함이 풍겼다.
서울일원 병원장 윤석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병원도 본격적인 도입 준비를 지시하겠습니다."
재민은 윤석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어제 청문회에서 "검토해 보겠다"며 흔들리던 그 나약한 지식인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이미 거대한 흐름에 굴복했고, 스스로 그 굴복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 대표 남궁진.
재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닿았을 때, 재민은 숨을 들이켰다. 남궁진은 승자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으나,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놓인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이 방에서 가장 참혹하고 슬퍼 보였다.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무제한으로 복제되고 소모될 미래를 예견한 설계자의 슬픔일까. 남궁진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어떤 음성도 마이크를 타고 나오지 못했다. 그는 비겁하게 재민의 시선을 피해 외면해 버렸다.
윤지아 교수가 삐걱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흔한 항의의 말도, 서류를 내던지는 몸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방을 챙겨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회의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이 둔탁하게 울렸다.
장태수 의원이 허탈하게 웃으며 확대파 위원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오늘 이 부끄러운 결정을 역사가 똑똑히 기억할 것입니다!"
최경식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비서가 건네는 외투를 받아 들었다. 서재현 교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내 파멸적인 예측이 제발 틀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정은수 교수가 젖은 눈으로 11장에서 재민이 던졌던 질문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헌법을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었지요... 하지만 저들에게 법이란 껍데기일 뿐이었군요."
그녀는 제 자리에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박철호 위원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라 있었다.
그때, 방청석 뒤편에 서 있던 김미영 위원장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회의장을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장내를 둘러보며 나직하지만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를 뱉었다.
"보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메마른 얼굴로 쏠렸다.
"우리의 고상한 대화와 목소리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분노조차 정제된, 차가운 패배의 선언. 그녀는 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액션을 확인했다. 아주 짧은 텍스트 메시지.
그것을 확인한 김미영의 눈빛이 일순간 단단하게 변했다. 더 이상 제도권의 룰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젖힌 이의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출구가 아닌,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회의장이 완전히 비어 갈 때까지 재민은 움직일 수 없었다.
"기록되었습니다."
이수가 차가운 기계음으로 세션의 종료를 알리며 데이터 패드를 닫았다. 찬성 8, 반대 6. 그 숫자가 서준이 흘렸던 보이지 않는 눈물과 미소의 검은 에러 로그들을 영원히 덮어버릴 것이었다.
유진이 재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재민..."
"아니야, 유진.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재민은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며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Episode 002: 균열
표결이 끝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국회 본관 로비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대리석 바닥 위로 세 사람의 발소리만이 불규칙하게 부딪혔다. 재민의 무거운 걸음, 유진의 조심스러운 걸음, 그리고 이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보행 센서 소리. 조명마저 반쯤 꺼진 로비는 마치 거대한 무덤 같았다.
재민이 로비 중앙의 거대한 기둥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유진."
"응, 재민."
"국가 경쟁력이라는 말... 정진욱 장관이 던졌던 그 화려한 프레임 말이야."
재민이 쓰게 웃었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라는 단어로 포장된 추악한 탐욕 아닐까?"
유진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 대신 우리 병원, 우리 기업, 우리 나라... 그 가증스러운 '우리'라는 명분이 개인의 이기심과 방관을 완벽하게 세탁해 주니까, 아무도 그 괴물 같은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던 거야. '우리'를 위해 기계를 쥐어짜고 인간을 길거리로 내쫓는 게 정의가 되어버린 거지."
유진은 어두운 대리석 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가슴속 깊이 느끼고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진실을, 재민이 가장 아프게 끄집어내고 있었다.
"응... 네 말이 맞아, 재민."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렇다면... 그 단단하고 비정한 고리를 깨부술 방법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보아도 보이는 것은 굳게 닫힌 의사당의 청동 문뿐이었다.
바로 그때, 유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비 끝 그늘진 유리문 쪽으로 향했다.
김미영 위원장이 어둠 속에 반쯤 묻힌 채 다급하게 전화를 통화하고 있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 가결됐어."
수화기 건너편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김미영의 음성에는 전례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네 말이 맞았어. 법 안에서 주둥이를 놀리는 짓거리는 아무 쓸모도 없어. 이제—— 방법을 바꿔야 해."
전화를 끊은 김미영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일말의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국회 의사당의 화려한 정문이 아닌, 저 컴컴한 분수대 광장 너머, 성난 군중이 횃불을 준비하고 있을 어둠 속을 향해 단호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평화적 타협의 시대가 끝나고,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시대가 개막하려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일원 병원 직원 휴게실.
박지영은 여전히 TV 속 뉴스 특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화면 하단에는 [속보: 안드로이드 도입 법안 8대 6 극적 가결]이라는 붉은 자막이 번쩍였다.
"결국 통과됐네... 다들 국가 경쟁력이니 뭐니 하더니만."
그녀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삼켰지만, 왠지 목구멍이 칼칼하게 막히는 기분이었다. 8대 6. 찬성한 이들의 얼굴도, 반대한 이들의 얼굴도 화면 속에서는 모두 기이할 정도로 어둡고 슬퍼 보였다. 승자조차 지어 보이지 못하는 미소.
'정말 간호사 언니 말이 맞나? 그 미소라는 로봇의 표정... 진짜 고통을 억지로 참느라 그렇게 기괴했던 걸까?'
가슴속의 찜찜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박지영은 홀린 듯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인터넷 검색창을 켠 뒤, 떨리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로봇 표정 이상
그러나 마지막 글자를 누르기 직전,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멈췄다. 만약 이 검색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자신이 믿어왔던 '안락하고 정당한 기본소득의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지영은 침을 삼키며 서둘러 화면을 꺼버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박힌 의심의 씨앗은 소리 없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재민과 유진은 마침내 국회 본관 무거운 청동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다. 계단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도심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은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웠다.
"재민, 그 고리를 깨는 방법... 정말 존재할까?"
유진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 아래로, 저 멀리 도심 외곽에서부터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붉은 울음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재민은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손가락 끝이 시려 왔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찾아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깃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파도가 그들을 집어삼키기 직전, 폭풍 전야의 마지막 고요가 밤의 계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