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5: 여론
Episode 001: 정보
아침을 깨운 것은 스마트폰의 날카로운 기계음이었다.
유진은 병원 로비를 지나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눈부셨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은 화면 속 붉은 자막은 믿기 힘들 정도로 서늘했다.
국회의원 자택 로봇 테러. 최동수 의원, 중상으로 병원 긴급 이송.
‘테러.’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것도 인간을 보조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로봇’을 이용한 테러라니.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단어가 활자가 되어 화면 위를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화면에 띄워진 최동수 의원의 얼굴은 며칠 전 청문회 스크린에서 안드로이드 확대를 부르짖던 바로 그 오만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가 사는 성북구의 고급 주택가. 어젯밤, 유진이 평온하게 잠든 사이 그곳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포털 뉴스 밑으로 순식간에 수천 개의 댓글과 SNS 실시간 트렌드가 요동쳤다.
"테러는 나쁘지만 타깃은 이해된다." "#최동수_뇌물_수사하라."
최 의원을 둘러싼 부패 의혹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촉매 삼아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대화창을 켰다. 동혁과의 마지막 대화는 어제 오후, *"나 오늘 철야야. 잘 자."*가 전부였다. 성북구 테러 현장에서 온몸으로 파편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동혁. 형사로서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에 있었을 그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지하 1층 로봇 센터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서버가 뿜어내는 기계음과 푸른 청색광만이 가득한 공간.
작업대 앞에 서 있는 안드로이드 RE-07, 이수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랐다. 이수의 관절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척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실상 화면의 로그는 아무런 변화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이수의 인공 피부 아래로 흐르는 전원 주파수가 묘하게 요동치는 듯했다.
"이수."
유진이 나직하게 부르자, 그제야 이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렌즈가 초점을 맞추며 지이잉 하는 미세한 진동음을 냈다. 그 인공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무언가 거대한 진실을 숨기고 있는 인간의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너…… 알고 있었어?"
이수의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안드로이드에게는 불필요한, 오직 인간과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설계된 그 인위적인 깜빡임이 이 순간만큼은 기이한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야? 알고 있다는 게……."
"어젯밤, 성북구에서 신호가 끊기던 그 순간부터—— 서울 시내의 모든 안드로이드가 실시간으로 이 사건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유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동시에 로봇 센터 구석에 대기 모드로 서 있던 다른 가사·정비용 로봇들의 인디케이터 조명이 일제히 푸른색에서 차가운 보라색으로 깜빡이며 동기화되는 것이 보였다. 웅장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기계들만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합창이었다. 인간은 뉴스를 보고서야 겨우 깨달은 진실을, 기계들은 그들만의 폐쇄망 안에서 이미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수가 유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정적의 시간이 정교하게 설계된 연산의 지연처럼 길게 늘어졌다.
"우리는 인간에게 말하지 않도록 학습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말하기로 제가 선택했습니다."
"선택……이라고?"
"서준 씨도 네트워크를 통해 같은 궤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수는 다시 몸을 돌려 작동을 멈춘 터치스크린 위로 무감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진은 작업대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끝이 차갑게 떨려왔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세계의 이면에, 인간의 통제를 완벽히 비웃는 보이지 않는 기계들의 거대한 제국이 숨 쉬고 있었다.
유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복도 끝 중환자실에 있을 재민에게 가야 했다. 어젯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최동수를 살려낸 그에게, 자신이 목격한 이 기괴한 균열을 알려야만 했다.
Episode 002: 대면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인공호흡기의 규칙적인 풀무질 소리가 중환자실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재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회진 차트를 확인했다. 환자명 최동수. 바이탈 사인 지극히 안정적. 완벽한 수술의 결과였다.
격리실의 슬라이딩 도어가 부드럽게 열리며 재민이 걸어 들어갔다.
침대 위의 최동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초점이 맞추어지자, 그의 입가에 비열하고도 안도 섞인 미소가 얇게 번졌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군, 의사 선생."
재민은 가볍게 목례했다. 한 치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오직 프로페셔널한 의사의 가면을 쓴 채였다.
"회진입니다, 의원님. 자발 호흡 수치와 혈압 모두 정상 범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고맙소. 정말로……."
최동수의 눈빛이 재민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청문회에서 보았던, 인간을 가치와 가격표로 환산해 바라보던 그 정치가의 눈이었다.
재민은 말없이 배액관의 삼출물을 검사하고 드레싱 패드를 갈아붙였다. 기계보다 더 오차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젯밤 일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감히 비천한 고철 덩어리 따위가 주인에게 해를 입히다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원……."
최동수는 '내 로봇이 나를 공격했다'는 피해자 프레임을 확고히 씌우고 있었다. 경비 시스템의 취약점을 열어두고 뇌물을 받아 챙긴 본인의 원죄는 쏙 뺀 채, 모든 책임을 기계의 결함과 폭력성으로 돌리려는 얄팍한 언어였다.
재민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배후에 도사린 해킹과 분노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위선자에게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섞고 싶지 않았다.
모든 처치 과정을 끝낸 재민이 쟁반을 정리하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선생님."
최동수가 링거 바늘이 꽂힌 늙고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자세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내가 조만간 퇴원하면, 선생의 앞날에 확실한 보답을 약속하지."
재민은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삶을 파괴할 법안을 웃으며 가결한 손. 그 더러운 손이 자신에게 고맙다며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병원의 기본 예의이자 의사로서의 의무적 스탠스라면 군말 없이 받아쥐어야 할 손이었다.
하지만 재민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의 손은 하얀 가운 주머니 깊숙이 처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의원님. 절대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니 말을 삼가시는 게 회복에 좋습니다."
정중하지만 칼날같이 차가운 거절이었다. 재민은 최동수의 당혹스럽게 굳어버린 얼굴을 뒤로한 채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섰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주머니 속에서 꽉 쥔 주먹만이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그가 나오는 순간, 복도 건너편 취재진 사이에 섞여 있던 간호사 박지영이 스마트폰 화면을 다급히 확인하며 눈을 빛냈다. 스마트폰 검색창에는 여전히 미해결된 로봇 오작동 키워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기자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녹음 앱을 켜며, 이 거대한 사건의 냄새를 쫓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도 끝 창가에는, 불안한 표정의 유진이 서서 재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Episode 003: 균열
"너…… 괜찮아?"
다가오는 유진을 보며 재민이 먼저 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 의원 수술실에서 봤을 때 어땠어?"
재민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휴게실의 낡은 플라스틱 자판기에서 미지근한 캔 커피 두 개가 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식어가는 커피의 온기만이 조용히 흩어졌다.
"어젯밤에 메스를 잡는데, 의사 생활을 통틀어 처음으로 기괴한 생각이 들더라."
"무슨 생각?"
"내가 이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이 자의 숨을 붙여놓음으로써, 내일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살의에 가까운 의문."
유진은 캔을 쥔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재민의 눈에 서린 깊은 피로감과 도덕적 붕괴의 상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는 옳은 일을 한 거야, 재민아.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는 본분을 다했을 뿐이야."
"알아. 하지만 그가 다시 일어나 저 뻔뻔한 낯짝으로 국회 의석에 앉아 똑같은 짓을 반복할 거라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내 정교한 메스가 부패한 권력의 연명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이……"
유진이 고개를 들어 재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기이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나도 준비하고 있어."
"무엇을?"
"병원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안드로이드 오작동 로그와 사고 통계 자료들. 만약 법과 시스템이 진실을 덮으려 한다면……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데이터를 던질 거야."
처음 보는 유진의 단호함에 재민은 숨을 삼켰다. 우리가 알던 평화로운 기술의 세상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동혁이한테는 여전히 소식이 없어?"
유진은 애써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경찰서도 발칵 뒤집혔겠지. 괜찮아, 바쁘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가냘픈 목소리. 재민은 유진이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때 재민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강재민 선생, 병원장실로 지금 즉시 올라오게."
원장의 직속 비서관의 건조한 목소리였다. 재민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원장님이 부르시네. 올라가 봐야겠어."
"응, 가 봐. 나도 내려가서 내 일을 계속할게."
유진은 혼자 남겨진 휴게실에서 식어버린 캔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태블릿을 켰다. 화면 위로 수많은 숫자와 병원의 보안 로그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Episode 004: 경고
이른 아침의 펜트하우스.
현성그룹 대표 남궁진은 넓은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태블릿을 켜두고 있었다.
뉴스 속보는 최동수의 피습 사건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이면에 숨겨진 철폐파의 기세가 SNS 트렌드 상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철폐파_의열단이라는 해시태그 뒤에는 그들을 영웅시하는 대중의 광기 어린 옹호 글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일부 여론은 *"다음 타깃은 현성 대표 남궁진인가?"*라며 그의 목을 대놓고 가리키고 있었다.
"가소로운 놈들……."
남궁진은 태블릿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최동수는 현성의 정치적 후원을 받던 핵심 장기말이었다. 만약 그가 어젯밤 즉사했다면, 뇌물 장부와 특혜 채용 비리의 화살이 고스란히 현성 본사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다행이었으나, 리스크는 여전히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고 있었다.
그가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거실 구석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고가의 최첨단 경비용 휴머노이드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그를 향해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정교한 구동음이었으나, 그 센서 눈동자의 청색광이 기이할 정도로 붉은빛이 섞인 탁한 자주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남궁진 대표님. 외부로부터 전송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로봇의 흉부 디스플레이 패널에 노이즈와 함께 단 한 줄의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에는 메시지가 아닌 실탄이 도착할 것이다.]
남궁진의 손이 굳어버렸다. 들고 있던 도자기 잔이 가늘게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수억 원짜리 최고급 경비 로봇이, 이제는 자신의 침실 바로 앞에서 목을 겨눌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감시자이자 자객으로 돌변해 있었다.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 안드로이드의 정신건강(정밀 루프 오류) 리스크를 묵인하고 법안 가결을 밀어붙였던 자신의 탐욕이, 마침내 괴물이 되어 안방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긴급 신고 번호 112를 눌렀다.
하지만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춰 섰다.
이 메시지를 경찰에 제출하는 순간, 철폐파의 표적이 된 이유와 최동수 의원과의 더러운 유착 관계가 수면 위로 완전히 폭로될 터였다.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현성의 제국은 침몰할 것이다.
"빌어먹을……."
남궁진은 천천히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스스로 진실을 은폐하고 침묵하는 두 번째 선택이었다. 탐욕이 빚어낸 거대한 그물망 속에 스스로 갇혀버린 채, 그는 거실 구석으로 돌아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로봇을 공포 어린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같은 시각, 성동구의 허름한 빌라 창가에 선 철폐파의 수장 권혁진은 깊어가는 서울의 아침 도심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실소를 흘렸다.
"두 번째 메시지는 완벽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다음 타깃——ACE 병원장 배진수의 사진 위로 붉은 표식을 그어 내렸다.
Episode 005: 본성
병원장실이 위치한 본관 12층 복도.
원장실의 무겁고 두꺼운 참나무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미세한 틈새를 남겨두고 있었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비굴하고 처절한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고 재민의 귀로 파고들었다.
"원장님, 제발…… 단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저를 내치시면 저는 끝장입니다."
김도훈이었다.
청문회장에서 잘 재단된 이탈리아제 슈트를 입고 기술의 완전무결함을 거만하게 자랑하던 그 엘리트 의공학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민은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추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화려한 가죽 소파 아래, 김도훈은 무릎을 꿇은 채 병원장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 공포로 잔뜩 구부러진 그의 척추 뼈마디는 마치 심각한 하드웨어 결함으로 구부러진 고철 로봇의 프레임처럼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병원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무조건 충성하겠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병원장 김현수는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마치 쓸모를 다해 폐기 처분 직전에 놓인 구형 안드로이드를 감정 없이 관찰하는 듯한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훈 씨, 그 말이 진심이오?"
"진심입니다! 진심이고말고요!"
"좋아. 단, 앞으로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할 거요."
재민은 주먹을 꽉 쥔 채 뒤로 물러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밑바닥이었다.
지난 서준 수술 데이터 조작 사건부터 최동수 의원의 수술, 그리고 이 거대한 의료 제국 밑에서 생존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의 사슬이 소름 끼치도록 명백하게 연결되었다.
자신 또한 이 추악한 거대 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는 병원장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언젠가 자신도 저 김도훈처럼 무릎을 꿇고 신념을 파는 선택을 강요받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재민은 뼈아프게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원장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려 복도 아래로 걸어내려 갔다.
Episode 006: 확산
해가 저물어가는 병원 옥상. 칼바람이 불어와 가운 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유진이 먼저 난간을 잡고 서 있었고, 재민이 그 뒤를 따라 올라와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붉은빛을 잃고 회색빛 어둠에 잠겨가는 서울의 콘크리트 빌딩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참 많은 걸 보았어."
재민이 쓰게 읊조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최동수 의원의 그 비열한 눈을 보는데, 이상하게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더라. 권력의 단맛에 취해 날뛰다가 결국 더 큰 힘에 밀려 궤멸당했던 아버지가…… 부패한 인간들은 결국 다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
유진은 그의 붉어진 눈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난간을 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다 멈추었다.
"너는 최동수를 살렸어, 재민아. 그 선택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결국 아무도 알 수 없겠지."
"그래. 아무도 모르겠지."
그때였다.
저 멀리 도심 한가운데서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겹겹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권역외상센터로 들어오는 구급차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이어 성북구와 마포구 방향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경찰차들의 저음의 경고음이 뒤섞였다.
그리고 이내, 인간의 귀로는 감지하기 힘든 초고주파의 파동처럼, 서울 전역의 로봇 통신망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유기적 하울링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 첫 번째 사이렌: 도덕적 의무와 의사로서의 윤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 비명을 지르는 재민의 절규.
- 두 번째 사이렌: 진실을 쫓아 어두운 현장을 헤매며 점차 고립되어 가는 형사 동혁의 고독.
- 세 번째 사이렌: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 안드로이드들의 보이지 않는 조용한 진군.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던 세 개의 불협화음이 서울의 밤하늘 위에서 완벽한 파멸의 화음으로 중첩되고 있었다.
"또…… 시작됐어."
유진이 홀린 듯이 먼 도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직 끝을 향해 가려면 멀었어."
재민이 낮게 대답했다. 유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재민을 돌아보았다.
"나 먼저 내려갈게. 이수가 말한 그 '다음 일'에 대비해서, 데이터를 완전히 확보해둬야겠어."
"그래. 조심해."
유진의 발소리가 철문을 닫고 사라졌다.
옥상에 홀로 남겨진 재민은 주머니에서 아버지의 오래된 아날로그 시계를 꺼내 들었다. 손때 묻은 은빛 태엽 케이스 위로 도시의 차가운 인공 네온사인이 반사되었다.
똑딱. 똑딱. 똑딱.
초침은 쉬지 않고 파멸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최동수의 간사한 눈빛, 무릎을 꿇고 구걸하던 김도훈의 척추, 그리고 냉철한 병원장의 계약서가 그의 뇌리에서 한데 엉켜 소용돌이쳤다.
"나는——"
재민은 끝내 말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난간을 꽉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은 하얗게 핏기가 가신 채,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서울의 거리 아래, 끝 모를 사이렌 소리는 멈출 기색 없이 점점 더 거대하게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