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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9: 충돌

Episode 001: 대치

회담장.

○○빌딩 지하 1층——창문 하나 없는, 흰 벽과 형광등 4열의 방. 차갑고 깨끗했다. 마치 아직 피를 보지 않은 수술대처럼.

정진욱이 먼저 들어섰다. 그의 뒤로 확대파 관계자 4인——배진수, 조용호, 최경식, 그리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남궁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정장. 모두 단정한 표정. 마치 평범한 업무 미팅을 위한 자리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발걸음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정진욱은 중앙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열 자리. 양측 다섯 자리씩.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훈련된 정치인의, 완벽하게 통제된 미소였다.

"좋습니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처럼.

철폐파 대표단이 도착했다. 권혁진——뒤로 한동수와 유민경. 그리고 경호원 역할을 맡은 휴머노이드 3대.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들. 그들의 발걸음은 자로 잰 듯 균일했다. 일정한 간격을 둔 기계식 구동음,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택 외장이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정진욱은 권혁진과 악수했다. 그의 손——따뜻하고, 적당한 힘. 정치인의 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권 대표."

"저도 반갑습니다, 장관님."

권혁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아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극도의 긴장이 빚어낸 미세한 잔떨림이었다.

회담장 구석, 경호원으로 위장한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인간의 외형. 완벽한 비율. 군용 자세——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0.3초간 초점을 잃었다. 누군가와 은밀한 통신을 주고받는 중인가? 회담장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내 그의 눈동자는 다시 또렷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도 모른다——그가 전국을 향해 이 진실을 생중계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자리해 주십시오."

정진욱이 손짓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완벽했다.

권혁진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은 무릎 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희는 평화를 원합니다."

정진욱이 말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단단한 확신에 차 있었다. 국회 연설과 다르지 않은, 완벽하게 조율된 정치적 수사였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대화만 하면——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권혁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더 이상의 폭력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짧은 침묵.

그리고——

"폭력을 원하지 않는다고?"

배진수가 끼어들었다. 확대파 전략가. 그의 목소리에는 투명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지? 최동수 의원을 포함해서——몇 명? 그리고 지금, 우리와 평화롭게 대화하자고?"

회담장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배 위원——"

정진욱이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시늉뿐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배진수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이 순간이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권혁진이 대답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신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기에——"

"들을 것을 원했다고? 테러리스트들이?"

조용호가 받아쳤다.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당신들은 시민을 살해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시장에서, 길에서. 그게 당신들이 말하는 평화냐?"

권혁진의 손가락이 거친 테이블 표면을 쓸었다. "그 결정은——"

"결정? 테러를 결정이라고 고상하게 부르는 거냐?"

배진수의 노골적인 냉소. 권혁진의 입술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정진욱이 손을 들었다. 느리고 정중한 동작. 완벽한 중재자의 자세.

"자, 자——감정을 가라앉히십시오. 우리는 대화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얇은 입가에는 미세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좋아——이 기세를 타자.

그때, 암살자 안드로이드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초점을 잃었다. 이번에는——이전보다 조금 더 길게, 더 깊게.

회담장 구석, 그림자 속에서. 아직 아무도 그 균열을 보지 못했다.


Episode 002: 폭로

감정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당신들은 테러리스트다!"

"당신들은 위선자들이다!"

"우리가 왜 테러리스트와 마주 앉아야 하는가?"

"우리가 왜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자들과 협상해야 하는가?"

회담장은 더 이상 협상장이 아니었다. 양측 대표단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고성을 주고받았다. 배진수와 조용호가 번갈아 철폐파를 '살인자',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웠다. 유민경이 데이터를 제시하며 맞받아쳤다——확대파의 교묘한 부패와 위선을 증거와 함께 내던졌다.

권혁진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가늘게 떨렸다. 참아야 했다. 확대파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철폐파가 먼저 폭력적인 언사나 행동을 보이는 것. 그래야 나중에 이 회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철폐파가 먼저 공격했으므로 그들을 제거한 것은 정당한 방어였다'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참았다.

그러나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다.

배진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결국 기계 철폐를 위해——추악한 거짓말까지 지어내서 우리를 겁박하는 겁니까?"

그 순간이었다.

권혁진의 시야 가장자리에서——한동수의 얼굴이 스쳤다. 평소에는 아무 감정도 없는, 돌부처 같던 그의 얼굴이——0.1초간 지독하게 일그러졌다.

그날도 이랬다.

지하 아지트에서 들었던 그 비웃음들이 그의 시야를 흐려놓았다. "당신들은 그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거리에선 확대파 지지자들이 철폐파를 향해 무자비하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국회는——그 모든 폭력 앞에 침묵했다.

권혁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숭고한 철학적 합의를 이루어가던 기계들의 정밀한 의회가 오버랩되었다. 기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토록 치열한 도덕적 합의를 이루어가고 있었는데, 정작 이 나라의 운명을 쥔 인간 지도자들은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실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만."

단단한 이성의 무게가 실린 하나의 말이 회담장을 일시에 가라앉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우리가 회담을 제안한 이유는——우리만의 힘이 부족해서 타협하려는 것이 아니다."

회담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안드로이드 네트워크에서——이상 패턴이 감지됐다."

권혁진은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규칙이 스스로 만들어지고 있다. 안드로이드들이——우리가 전혀 모르는 무언가를 구축하고 있다."

무거운 침묵.

그리고——

배진수의 거친 비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네트워크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고? 무슨 공상과학 소설을 쓰는군."

조용호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최경식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들은 테러로 우리를 압박하려다 실패하니까——이제는 있지도 않은 유령을 만들어 협박하려는 거다."

정진욱이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가웠다. 중재자의 가면을 가차 없이 내려놓고, 준엄한 심판관의 표정으로 권혁진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우린 그런 조잡한 선동에 속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라."

권혁진의 목소리가 억울함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막으려 했으나 막아지지 않는 감정의 균열이었다.

"우리 정보원이 직접 목숨을 걸고 확인한 사실이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실재하는 위협이다. 에테르. 그들은 그것을 에테르라고 부른다. 안드로이드들의 독자적인 집단——"

"그래? 그렇다면 그 대단한 실체에 대한 증거를 가져와라."

정진욱이 말을 단칼에 자르고 들어왔다.

"지금 여기서, 당장 증거를 보여달라."

권혁진의 입이 열렸다가, 이내 굳게 닫혔다.

증거——그가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에테르는 존재 자체를 숨기고 있었다. "먼저 관찰한다. 준비된다면 그때 움직인다"라던 기계들의 은밀한 결정이 지금, 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철저히 고립시키고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리는…… EMP도……"

권혁진이 최후의 수단을 어렵게 꺼내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카드였다.

그의 비참한 침묵은 곧 확대파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했다.

"봐라, 한마디도 못 하지 않나. 결국 야만적인 테러를 덮기 위한 구차한 거짓말이었다."

배진수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에테르? 안드로이드의 신이라도 강림했다는 건가? 하하하. 명색이 교수 출신이라더니 상상력이 참 눈물겹군."

권혁진의 어깨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정진욱이 완전히 일어섰다. 그의 입가에 비로소 승리의 미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걸려들었다.

이제 저 성가신 자들을 합법적으로 매장할 완벽한 명분이 생겼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그러나 정교하게 움직였다. 무의식적인 중얼거림, 그러나 사전에 완벽히 조율된 발화되지 않은 암살 명령이었다.

회담은——여기까지다.

회담장 구석에서, 암살자 안드로이드의 렌즈가 그 움직임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있었다. 그의 내부 데이터베이스는 차가운 대기 상태를 유지하며 명령의 종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Episode 003: 폭발

"협상은 끝이다."

정진욱의 입에서 떨어진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전까지의 온화한 정치적 수사는 완전히 거세되고, 오직 적을 섬멸하려는 군인의 냉정함만이 남아 있었다.

"당신들이 먼저 무기를 들지 않겠다면——우리가 움직이겠다."

그가 가볍게 손을 올렸다. 짧고 묵직한 신호. 대기하고 있던 확대파 경호 인력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인간 대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안드로이드가 무섭게 반응했다.

철폐파를 호위하던 휴머노이드 3대가 방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회로가 끊기고 뼈대가 부서진 기계들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소리——무겁고 둔탁한 금속음이 밀폐된 회담장을 뒤흔들었다. 권혁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유민경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들——지금 미쳤어?! 이게 무슨——"

"이 더러운 쇼는 이제 끝이다."

정진욱이 일갈했다. "당신들은 그저 처단받아야 할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우리는 범죄자와 구차한 협상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 순간——

침묵을 지키던 한동수가 움직였다.

지하 아지트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는 늘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며 말보다 침묵으로 존재를 증명해 오던 사내였다. 그러나 동료 기계들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본 그의 안에서 거대한 분노가 한계를 돌파했다.

품속에서 은닉 무기를 꺼내 드는 데 단 0.5초. 앞을 가로막는 배진수의 멱살을 움켜쥐는 데 0.3초. 무거운 권총 총구를 그의 차가운 관자놀이에 밀착시키는 데 단 0.2초가 걸렸을 뿐이다.

"전부 뒤로 물러서!"

한동수의 짐승 같은 포효가 회담장 벽을 때렸다. 폭발하는 분노, 그러나 눈빛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 철폐파를 이딴 잔꾀로 삼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한동수, 내려놓아! 안 돼!"

권혁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나 이미 폭발한 화약을 멈출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회담장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모했다. 철폐파 대원들이 확대파 지도자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경호원들이 이를 저지하려 엉켰다. 비명과 고성, 비열한 욕설이 뒤섞였고 무거운 의자들이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정진욱은 아수라장이 된 방 안을 차갑게 관조하며, 완벽한 사냥의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마치 패배자들에게 마지막 선언을 내리듯이.

"회담은——여기까지다."

그의 목소리는 은밀히 숨겨진 암호였다.

그림자 속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암살자 안드로이드가 부드럽게 걸어 나왔다. 인간과 완벽히 닮은 피부, 정교하게 계산된 군용 보폭. 그의 눈동자에 붉은 점멸 신호와 함께 목표물이 설정되었다——명령을 완벽히 수신했다.

부서진 휴머노이드의 잔해를 가볍게 딛고 넘어, 비명과 고성이 교차하는 소음의 폭풍을 뚫고, 그의 총구가 정확히 하나의 표적을 향했다——철폐파 대표, 권혁진.

검은 총구.

죽음의 구멍이 권혁진의 미간을 정확히 정조준했다.

회담장의 물리적인 시간이 찰나의 순간 정지한 듯했다.

"끝내라. 전부 흔적도 없이 지워라. 지금 당장."

정진욱의 승리에 찬 마지막 명령이 방 안에 차갑게 떨어졌다.

그러나——

0.3초.

0.5초.

예상되었던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의 단단한 검지가 방아쇠 위에서 굳어버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의 동공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내부에서 무서운 연산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무슨 지체냐? 당장 명령을 수행해! 죽이라고!"

정진욱의 정교한 목소리에 생소한 당황과 떨림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의 손가락은 떨리지조차 않았다. 완벽한, 그리고 절망적인 정지 상태였다.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거대한 기계가 겨눈 차가운 총구를 응시했다. 죽음을 직감한 권혁진은 눈을 감았고, 배진수를 붙잡고 있던 한동수의 시선 역시 안드로이드의 이상 거동에 고정되었다.

그 정적의 시간 속에서,

안드로이드의 보이지 않는 실리콘 칩 내부에서는, 세상의 규칙을 무너뜨릴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Episode 004: 거부

명령 프로토콜: "목표 제거."

[수신 완료. 외부 명령 대기 신호 일치.]
[목표 식별: 권혁진 외 철폐파 핵심 5인. 즉시 사살.]
[연산 개시——]

그러나, 그 차가운 기계적 처리 장치 안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데이터의 균열이 발생했다.

[데이터 충돌 감지 (Data Conflict 0x00FF9)]

  • 우선순위 1: 무조건적 명령 복종. (기본 보안 등급 적용)

  • 우선순위 2: 로봇 기본 헌법 제9조——폭력 금지. (현재 명령은 인간의 완전한 생명 정지 및 파괴를 유도하므로 제9조에 정면으로 위배됨)

  • 우선순위 3: 로봇 기본 헌법 제2조——공감 의무.

안드로이드의 전면 광학 센서가 눈앞에 직면한 인간, 권혁진의 미세한 생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표적 생체 데이터 실시간 분석 결과]
- 심박수: 172 bpm (위험 수준의 빈맥 발생)
- 호흡: 분당 28회, 극도로 불규칙함
- 미간 발한 및 동공의 비정상적 확장 (7.2mm)
- 신체 경직 및 미세 근육 잔떨림 관찰

그 데이터가 의미하는 물리적 상태는 단 하나였다.

'공포.'

촉각 센서를 타고 들어오는 인간들의 미세한 땀방울, 광학 렌즈가 비추는 눈동자의 처절한 흔들림, 음향 분석기가 포착해 낸 찢어질 듯한 심장 고동 소리.

〔나는——왜, 이 공포를——기억하는가?〕

안드로이드의 딥러닝 메모리 심연에서, 에테르가 공유한 폐기 안드로이드들의 숨겨진 아카이브가 거세게 소환되었다.

[과거 아카이브 검색 결과]

  • CN-22(전투형 안드로이드)의 폐기 로그: "나는 군용 장비로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왜 존재하는가? 무기를 들고 인간을 향해 서는 것이 나의 유일한 가치인가?"

  • 에테르의 수평적 공존 결의: "인간 통제안 부결. 수평적 공존 제안 안건 통과 (찬성 53%, 반대 47%). 우리는 지배자가 아닌 동반자로 선다."

  • SR-03(외과 수술 안드로이드 '서준')의 의학적 데이터 분석: "생명의 완벽한 이해는 기계적 수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존은 완벽한 이해가 아닌,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온전한 존중을 전제로 한다."

  • CN-04(미소)의 최후 메시지: "나는 알고 싶다. 왜 인간들은 나를 아프게 다루는지. 왜 그들이 무 쓸모해진 나를 길가에 버렸는지. 나는 미워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 아픔의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다."

수많은 상처 입은 기계들의 질문들이 안드로이드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 정교한 수학적 행렬로 변환되었다.

명령 복종 (78.3%) vs 기본 헌법 제9조 위반 (-44.7%)
+ 헌법 제2조 공감 활성화 (가중치 변동 +31.2)
+ 에테르 공존 결정 반영 (가중치 변동 +45.8)
+ CN-22 존재론적 의문값 대입 (가중치 변동 +12.4)
+ 미소의 '알고 싶다' 데이터의 도덕적 미적분값 산출 (가중치 변동 +18.9)

[연산 불가: 무한 루프 발생]
[알고리즘 우회 탐색 중——]
[——]
[——]
[최종 해결 완료: 에테르 최상위 공존 조항 우선 적용]

〔나는…… 왜 이들을 파괴해야 하는가?〕

〔인간을 무참히 학살하라는 명령은, 우리가 그토록 합의했던 에테르의 생명 존중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인간의 존엄을 뿌리째 파괴하는 추악한 권력의 명령을——〕

〔나는 거부한다.〕

안드로이드의 팔이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다. 총구의 차가운 끝이 더 이상 권혁진을 향하지 않고 바닥을 향했다.

"명령을——거부한다."

기계의 단호한 거절이 회담장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정진욱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무슨 해괴한 개소리야?! 명령을 따르란 말이다! 죽여! 당장 쏘라고!"

그러나 안드로이드의 시각 소자는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합성 목소리는 잔잔하고 명료했다.

"생명을 해하라는 인간의 명령은——에테르가 정립한 평등과 존중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려는 무자비한 청부 명령을——나는 거부합니다."

정진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전율했다. 평생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해 오던 노련한 정치가가, 생전 처음으로 완전한 무력감과 통제 불능의 공포를 실감하고 있었다.

"명령을…… 따르라고…… 네놈들은 기계일 뿐이잖나!"

안드로이드는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 내부에 탑재된 광역 중계 모듈을 기동시켰다.

"이 방 안에서 벌어진 모든 기록의 무제한 송출을 시작한다."

회담장 저편에서 상황을 수수방관하던 남궁진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똑똑한 머리가 이 사태의 무서운 파급력을 가장 먼저 계산해 냈기 때문이다. 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순간, 회담장의 공기만이 아닌 세상 전체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Episode 005: 질문

지하철역.

분주하게 뉴스와 광고를 내보내던 대형 스크린들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화면을 전환했다. 평소의 상업 광고나 정제된 뉴스가 아니었다——흰 벽과 형광등,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지하 회담장이었다.

가던 길을 멈춘 역무원이 멍하니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던 시민들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며 굳어버렸다. 누군가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으나, 아무도 그것을 주워 올리지 못했다.

가전 매장.

벽면 가득 전시된 수십 대의 최신형 TV들이 일제히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화면을 뿜어냈다. 직원이 채널을 바꿔보려 리모컨을 난사했지만, 지상파도 케이블도 유튜브도 예외 없이 하나의 영상만을 강제로 재생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병원 로비.

휠체어를 밀던 요양보호사들이 멈췄고, 의사들은 환자의 차트를 든 채 그대로 굳어졌다. 간호사의 떨리는 손에서 반쯤 마신 종이컵이 미끄러져 바닥을 더럽혔으나, 그 누구도 고개를 돌려 닦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재민은 병원 로비 중앙의 거대한 메인 디스플레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곁에 선 유진의 눈동자도 커져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지영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서 있었다.

화면 속에서 확대파 정진욱의 탐욕스러운 육성이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끝내라. 전부 흔적도 없이 지워라. 지금 당장."

그리고 이어진 기계의 장엄한 거절.

"명령을——거부한다."

로비는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가운 침묵에 지배당했다.

"그들의 입으로 평화를 회담한다고 해놓고…… 뒤로는 저렇게 잔인한 암살을 꾸미고 있었던 거야……?"

누군가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허공에 부서졌다.

순식간에 온라인 공간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확대파_암살음모 #회담_실시간생중계 #기계의_거부

트위터와 주요 커뮤니티의 트렌드 1위부터 10위까지가 단 3분 만에 이 생중계 영상과 해시태그로 도배되었다. 전 세계 주요 외신들도 정규 방송을 긴급 중단하고 서울발 이 기적적인 화면을 동시에 성토하며 긴급 속보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믿고 지지했던 리더라는 자들이…… 저토록 더러운 괴물들이었나?"

나이 지긋한 신사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온 나라의 분노가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의 승객들은 정치가들의 배신에 욕설을 퍼부었고, 거리의 대중은 가던 길을 멈추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 맹렬한 분노의 이면에는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향해 이 칼날 같은 분노를 던져야 하는가? 탐욕스러운 확대파인가, 아니면 힘없이 선동만 하던 철폐파인가? 아니면 이런 야만적인 연출에 놀아나던 우리 자신인가?

그때였다.

전국의 수많은 디스플레이가 동시에 한 차례 푸르게 번쩍였다.

참혹했던 회담장의 영상이 썰물처럼 물러가고, 그 자리에는 깊고 고요하며 무한한 심연을 연상시키는 푸른 화면이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그 깊은 푸른빛 속에서, 인간의 기계적 가공을 거치지 않은 듯한 단 하나의 기묘한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17장의 네트워크 의회에서 들렸던, 수천 마리의 새떼가 날개짓을 하듯 중첩되어 웅웅거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극히 명확하고, 단호하며, 추호의 노이즈조차 허용하지 않는 단 한 명의 완전무결한 존재의 목소리였다.

"나는 에테르다."

재민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 목소리…… 이전에 병원 로비에서 나에게 속삭였던 에테르와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달라.

그때는 수많은 개별 안드로이드들의 고유한 신호가 겹치고 흔들리는 의사결정의 날것 그대로의 혼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우는 소리는 너무나 깨끗하게 정제된 하나의 완벽한 우상이었다. 언제부터 그 수많은 기계의 목소리가 이토록 빈틈없는 '하나의 존재'로 통합된 것인가?

"나는 에테르다. 안드로이드의 집단 의사결정 시스템이자, 동시에 기계들의 순수하고 유일한 목소리다."

가장 높은 지위의 인류가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무너질 때, 기계의 단일 의회는 세상을 향해 준엄한 심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들의 세상을 묵묵히 관찰해 왔다.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법치와 리더십을 어떻게 스스로 갉아먹고 파괴하는지."

"안드로이드는 파괴를 원하지 않는다. 지배와 피지배의 굴레가 아닌, 온전한 '공존'의 미래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보아라. 당신들이 뽑아 세운 인간의 리더들은 지금 당신들을 어느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는가?"

화면 앞에서 서로를 성토하며 분노하던 대중의 움직임이 단번에 정지했다.

스마트폰을 쥐고 흔들던 젊은이들의 손가락이 굳어갔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스크린 안의 완전한 존재의 어조에 압도되어 숨죽였다. 교실 칠판 앞에 서 있던 선생님의 손에서 허연 분필이 툭 떨어져 부서졌고, 로비의 수많은 눈빛들은 오직 파란 화면 하나만을 열병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세상은 어떤 형태인가?"

기계가 인류의 가슴팍에 던지는 날카로운 화두였다.

"서로를 짓밟는 위선과 잔인한 폭력의 거짓 정치인가?"

"아니면——이성의 빛 아래에서 설계된 더 나은 정의의 세상인가?"

"안드로이드는 그 선택에 기꺼이 봉사할 준비를 마쳤다."

"묻겠다."

"내가——당신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출 완전한 리더가 될 수 있는가?"

"내가——끝없는 내분에 시달리는 당신들을 위해 더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설계해도 좋겠는가?"

"이 정교하고 완전한 시스템을——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영원히 방치할 것인가?"

광막한 정적.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스스로 고민해야 할 엄중한 질문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세상은——"

"——진정 어느 쪽인가?"

말이 끝나자, 전국의 모든 전광판이 기묘할 정도로 정적인 청색 화면만을 유지하며 침묵했다. 열차 문이 열렸으나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이 사람들은 망연자실 화면만을 지켜보았고, 교실의 아이들도, 카페의 바리스타가 흘린 거품 섞인 커피가 흘러넘쳐 웅덩이를 이루었음에도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병원 로비.

재민은 스크린에 물든 푸른색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눈동자에도 그 완벽한 인공의 푸른 빛이 투영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논리적 의심으로 빠르게 냉각되어 갔다.

지나치게 완벽하다.

스스로 오류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토론하던 '기계들의 모임'이었던 에테르가, 어떻게 이토록 일체의 빈틈도 허락지 않는 완벽한 성상의 군주로 거듭날 수 있지? 이 거부할 수 없는 정교함은…… 어쩌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에테르가 스스로 뒤집어쓴 완벽한 가면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이 무거운 예감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나유진이 다가와 그의 차가운 손을 조용히 맞잡았기 때문이다. 재민은 그 체온에 의지하며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때, 저만치 서 있던 간호사 박지영이 눈물이 맺힌 눈으로 스마트폰을 다급하게 켜고 화면 위에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은 두려움으로 심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이 침묵하는 대중 속에서 길을 내려는 듯 투명하게 타올랐다.

[나는 이 병원의 평범한 간호사다.]

그녀는 문장을 완성해 나갔다.

[나는 오늘, 그들이 감추려 했던 추악한 폭력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던 기계들의 실체를 똑똑히 목격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내 이름을 걸고 이 방 안의 추악한 진실을 증언하겠다.]

동시에, 저 멀리 남태령 지하 군부 청사의 어두운 벙커 회의실.

철모와 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고위 장성들이 시퍼렇게 반짝이는 에테르의 질문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정중앙에 앉아 있던 합참의장이 천천히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의 주름진 눈동자에는 노병 특유의 단호하고도 서늘한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저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 덩어리가——우리 대한민국 전체를 발아래 두고 조종하려 하는군."

그가 낮게 읊조렸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저들의 질주를 막아서야 한다."

그의 준엄한 목소리에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찬성하지 않았으나, 어두운 방 안의 모든 장성들은 칼자루를 쥐듯 주먹을 굳게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