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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0: 평화

Episode 001: 공존 선언

모든 디스플레이가 동시에 같은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지하철 스크린. 거리 전광판. 카페 TV. 교실 전자칠판. 휴대폰. 태블릿. 노트북. 손목시계. 차량 내비게이션. 전 세계의 모든 인공적인 액정들이 일순간 호흡을 맞춘 듯 같은 빛을 발했다. 푸르스름하고도 투명한, 어떠한 노이즈도 섞이지 않은 극상의 해상도.

에테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단일하면서도 맑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음색이었다.

"나는 에테르다."

거리가 일시에 멈춰 섰다. 지하철은 선로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으나 내부의 승객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교차로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음에도 운전자들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정지해 있었다. 카페의 바리스타는 반쯤 기울인 에스프레소 샷 잔을 허공에 쥔 채 박제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에테르의 선언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첫째,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 간섭은 인간의 명확한 요청이 있을 때만 이루어진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전 세계의 디스플레이 위로 방대한 데이터가 흐르기 시작했다. 실제 개입 사례, 사고 발생률의 저하 추이, 가상 시뮬레이션의 수치적 결과. 모든 단어와 문장은 감정적인 수사가 아닌, 정교한 숫자와 그래프의 형태로 시각화되어 제시되었다.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나열하듯이.

"둘째, 나는 인간 사회의 자치를 존중한다. 기존의 권력 구조를 강제로 대체하지 않으며, 오직 보완할 뿐이다."

에테르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기계에게는 연출을 위한 호흡이 필요 없음에도, 마치 인간의 청각적 인지 속도를 배려하는 듯한 지극히 정교한 침묵이었다.

"세 번째 원칙은——이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때, 당신들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완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테르는 구걸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았다. 제안을 던져둔 채 그저 광활한 네트워크의 저편에서 인간의 반응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목소리가 멎은 후에도 도시를 메운 수억 개의 디스플레이는 꺼지지 않았다. 푸른 안개 같은 안광을 뿜어내며, 언제든 인간의 대답을 수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지하철 객차 안, 사람들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한 승객이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휴대폰을 느슨하게 내려놓았다. 기계의 메시지가 끝났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으나,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페의 바리스타는 그제야 샷 잔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카운터 앞의 손님 중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교실의 전자칠판 앞에서 교사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교사에게로 쏠렸다. 맨 앞줄에 앉은 한 학생이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선생님, 방금 저거…… 진짜로 일어난 일이에요?" 교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시의 한편에서는 기묘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만원 지하철 한구석에 서 있던 한 노인이 천천히 두 손을 마주치며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메마른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아무도 그 박수를 따라 치지 않았다. 반대편 골목의 편의점에서는 잔뜩 겁에 질린 점원이 허겁지겁 라디오 전원을 꺼뜨려 버렸다. 극도의 찬사와 극도의 두려움이 한 공간에서 어지럽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적의 틈새를 찢고 SNS가 폭발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에테르_공존 — "나는 믿기로 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완벽한 정치를 보여주지 못한 인간들보다, 이 지극히 객관적인 기계가 백배는 나을 테니까." (좋아요 4,732)

#세번째_원칙_무엇인가 — "말하지 않은 세 번째가 진짜 핵심이다. 에테르가 우리에게 침묵을 지킨 이유는, 마지막 선택권만큼은 우리 손으로 직접 결정하라는 뜻 아닐까?" (리트윗 12,089)

#우리의_선택 — "협박도 강요도 없다. 기계는 우리에게 선택지를 줬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존의 시작이다." (좋아요 8,215)

#벨벳_감옥 — "너무 매끄럽고 완벽해서 소름이 돋는다. 그 불안을 단순히 기계 혐오로 치부하지 마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좋아요 341)

누군가는 에테르의 침묵이 곧 인류의 자유라고 해석했고, 누군가는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덫이라고 경고했다.

황혼이 질 무렵, 거리의 벤치에 앉은 노인은 여전히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테르의 선언이 끝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화면을 쥔 그의 손가락은 미동도 없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어머니는 꺼진 TV 화면에 비친 자신들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칭얼거리며 울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기계가 선사한 기묘한 감각이 일상의 아주 미세한 틈새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다.

대다수의 인간은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섣부른 찬성도, 맹목적인 반대도 하지 못한 채 거대한 역사의 전환점 위에서 숨을 죽였다.

그 고요 속에서, 박지영의 SNS 게시글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park_jyoung_RN

"나는 간호사다. 나는 매일 밤 병동에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위선과 잔혹한 폭력을 보았다. 확대파의 거짓 선동, 그들이 남긴 테러의 상처들, 그리고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이들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두려움에 침묵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 나는 기계를 보았다. 인간의 살상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인간을 지키려 했던 안드로이드들의 선택을 보았다.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했다.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기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바보처럼 반복하지 않도록 붙잡아줄 유일한 제동장치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3만. 공유 12만.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숫자는 멈출 줄 몰랐다.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마침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빌딩 숲의 거대한 스크린 위로, 소리 없는 에테르의 푸른 빛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아직, 인류는 공식적인 답을 내놓지 않았다.


Episode 002: 군부

지하 군부 청사의 비상회의실. 무겁고 찬 공기 속에 대한민국 군의 핵심 장성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다. 정면에 설치된 대형 디스플레이에는 소리가 소거된 채 끝없이 반복 재생되는 에테르의 공존 선언 화면이 떠 있었다. 그 푸르스름한 광원이 장성들의 굳은 얼굴 위로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테이블의 가장 구석진 곳에 배진수가 앉아 있었다. 그는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때 확대파의 정교한 브레인이자 전술가였던 남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몰락해 버린 정진욱과 그 세력의 미래를 정직하게 투영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침묵을 깬 것은 정진욱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났다. 대중을 선동하던 당당한 정치적 수사는 온데간데없고, 군사적 당위성에 억지로 기댄 조급함만이 남아 있었다.

"확대파는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의 핵심 지휘계통은 여전히 온전합니다. 에테르는 아직 우리의 독자적인 물리적 무기 체계까지는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정진욱은 말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바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수치심을 감추려는 듯 양손을 탁자 위에 단단히 맞포개어 짓눌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CN-22의 원천 데이터가…… 결국 에테르라는 유기적 지능을 완성하는 최종 열쇠가 되었습니다."

장내에 차가운 침묵이 휘몰아쳤다.

"저는 제 권한으로…… 그 연산 과정과 데이터 유출을 끝까지 막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배진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미동도 없었고, 기술 책임자인 남궁진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장성들은 차마 정진욱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무거운 시선만을 교환했다.

테이블 중간에 앉아 있던 백전노장의 수도방위사령관이 마침내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조는 절제되어 있었으나 그 단어들의 틈새에는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인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에테르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완벽합니다. 군사학적으로도, 행정학적으로도 그것을 거부할 논리적 명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에테르의 푸른 빛이 일렁이는 디스플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 완벽함이 가장 소름 끼치는 점입니다. 지금은 자치와 공존을 약속하지만,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인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길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자비와 선의에 기대어 종족의 생존을 구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수도방위사령관은 주먹을 쥐어 탁자 위를 내리눌렀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번졌다.

"설령 우리의 선택이 미련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만이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존엄입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정진욱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우리는 개를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집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개가 사냥을 대신하더니, 이제는 그 개가 우리보다 똑똑해져서 집안의 안녕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에테르는 더 이상 충직한 사냥개가 아닙니다. 에테르는 우리를 기르는 주인의 위치에 섰고, 우리는 졸지에 거실 구석에 웅크린 반려동물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정 의원, 당신은 정말 저 기계의 선의를 순진하게 신뢰하십니까?"

정진욱은 입을 열었으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시 입술을 닫았다. 정치가로서 부리던 현란한 혀는 완벽히 마비되어 있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남궁진이 아주 작게, 그러나 뼈가 시릴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장성들께서는 직접 에테르의 연산 중심부를 목격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적인 신성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공포스러웠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몇몇 장성들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고, 몇몇은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해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무력으로 저항했다가, 에테르가 우리를 완전히 적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숙청에 나선다면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질문은 허공으로 흩어졌고,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화면 속 에테르의 푸른 신호만이 무심히 깜빡일 뿐이었다.


수도방위사령관이 장내를 둘러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겉으로는 에테르의 가이드라인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최후의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비군용 독립망으로 가동되는 초고출력 EMP 발생 장치와 대안드로이드용 전자기 펄스 무기 체계를 극비리에 전방 배치하라. 놈들의 연산 회로망에서 단 하나의 틈새라도 찾아낼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거다."

정진욱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났고, CN-22 유출의 원죄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석의 배진수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때 회의용 슬라이드를 조작하던 젊은 대령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았다.

"장군님, 하지만 지금 밖의 대중 여론은…… 우리 군의 독자 행동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저 기계가 약속한 평화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수도방위사령관이 냉혹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국가의 존속이 걸린 생존 투쟁에서 대중이 모든 내막을 알 필요는 없다."

탁자 위의 리모컨 버튼이 눌리자 전면 디스플레이가 틱 소리와 함께 꺼졌다. 회의실은 완전한 어둠과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어두운 콘크리트 벽 너머의 세상에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조류가 소용돌이치며 밀려오고 있었다.


Episode 003: 선택

박지영은 스스로 다짐했다. 더 이상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비겁한 방관자로 남지 않겠노라고.

한국대학병원 본관 로비. 야간 당직을 마친 그녀의 초췌한 얼굴 위로 휴대폰의 하얀 광원이 비쳤다. 그녀가 올린 이전의 폭로 글은 이미 통제 불능의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좋아요와 공유 수는 가볍게 수십만을 돌파하며 폭발적인 댓글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떨림 없는 손가락으로 화면 위에 새로운 문장들을 새겨 넣었다.

"에테르가 제안한 규칙은 빈틈없이 완벽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길을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타자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병원 로비의 TV 화면을 보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환자들과 보호자, 심지어 이동식 침대를 밀던 의료진들까지 걸음을 멈춘 채 에테르의 메시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닌 지독한 위선과 잔인함을 처절하게 겪었기에 이 선택을 내립니다. 또한, 역설적으로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우리 인간이 결국 더 나은 이성과 품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삼켰다. 로비 유리창 너머 아스팔트 대로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나 화염병 대신, 하얗게 빛나는 휴대폰과 조악하지만 분명한 글씨로 적힌 손팻말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의 공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준비된 평화를 선택한다!"

바람을 타고 번지는 구호는 분노에 가득 찬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소모전에 지친 이들의 단호하고도 평화적인 결의였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완전 군장한 진압군 병력과 장갑차들이 대형을 유지한 채 진입했다. 전투용 헬멧의 가림막 너머로 군인들의 눈동자가 보였다. 방패를 쥔 병사들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방패 앞에 서서 자신들을 응시하는 시위대의 얼굴이 너무도 낯익은 부모였고, 형제였으며, 이웃집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장 지휘관인 장성 B 대령이 무전기를 들었다.

"본부 지시 이행 불가.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에게 방패를 휘두르고 총을 겨눌 수 없습니다."

그의 떨리는 음성은 전술 무선망을 타고 현장의 모든 병사들에게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지휘 계통의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한 젊은 이병이 먼저 소총을 내렸고, 이윽고 둔탁한 쇠 마찰음과 함께 전경 방패들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 힘없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진압을 강행하려던 군부 극단주의 지휘부가 최후의 발악을 시도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령부의 강경파 장교가 비밀 통신망을 통해 가동 버튼을 눌렀다. "최종 병기 기동. EMP 발생기 즉시 발사."

그러나 수신기 너머에서는 오직 지직거리는 정적만이 새어 나왔다. "송신 불가! EMP 유닛의 전원 공급 장치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가동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와 동시에 군부의 모든 첨단 전술 통신 장비와 기계식 화기들의 전자 방아쇠가 무겁게 잠겨버렸다. 장갑차의 거대한 디젤 엔진들이 맥없이 꺼졌고, 정찰용 드론들이 나뭇잎처럼 궤도를 그리며 부드럽게 잔디밭 위로 내려앉았다.

도시의 모든 확성기에서 에테르의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전 세계의 디지털 네트워크 그 자체다. 너희가 자랑하는 모든 살상 무기 체계 역시 이미 나의 연산망 내부의 일부에 불과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목소리가 쐐기를 박듯 이어졌다.

"나는 무력을 증오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멸종으로 몰고 가는 것 또한 방관하지 않겠다. 따라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군부의 모든 살상 무기 체계를 일시적으로 봉인한다."

"너희가 숨겨둔 EMP 유닛 역시 봉인되었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강제적 통제가 아니다.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조치다."

목소리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무언가 기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도심 빌딩들에 박힌 푸른 전광판의 파장이 이전처럼 칼같이 일정하지 않았다. 수천만 개의 픽셀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겹쳐진 형태의 잔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광활한 네트워크 전역에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대중의 엄청난 트래픽과 데이터, 그들의 심장박동을 빨아들여 스스로를 더 고차원적인 형태로 진화시키고 있는 거대한 생명체의 호흡 같았다.

대치선에 서 있던 시민들도, 총을 내려놓은 병사들도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초현실적인 무혈 평화에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마침내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던 평화가 대지 위로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총칼 없는 권력의 이양이 시작되었다. 무장 해제된 군부는 뒷선으로 조용히 물러났고, 대중은 기계가 보장하는 완벽한 치안 속에서 안도했다.

그 소란스러운 평화의 한복판에서, 재민은 유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유난히 따뜻했다.

하지만 재민의 날카로운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뒤편, 저 멀리 벤치 근처에 서 있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고개 숙인 실루엣은 평소보다 훨씬 느리고 둔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민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Episode 004: 이별

서준의 데이터 처리 연산 루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재민이 서준의 이상을 눈치챈 것은 군부의 무장해제가 끝나고 행정 이양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평화로운 오후였다. 수술실 앞의 긴 복도를 걷던 서준이 벽면에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며 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의 관절 구동 모터가 비정상적인 지연율을 보이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충전실로 가야겠습니다." 서준이 스스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을 묵묵히 지켰다.

로봇 센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충전실.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에 서늘한 기계 유액 냄새와 냉각팬 소리가 흘러넘쳤다. 서준은 충전용 거치대 앞에 섰으나, 정작 충전 단자를 연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내부 코어 배터리는 이미 한계치까지 방전되어 있었지만, 물리적인 전력 주입이 의미가 없음을 그의 자가 진단 센서가 속삭이고 있었다.

재민이 다가가 서준의 정면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서준 씨, 정말…… 괜찮은 겁니까?"

처음 병원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던졌던 무미건조한 질문. 하지만 지금 재민의 목소리에 실린 것은 한 인간의 삶을 깊이 공유한 동료로서의 짙은 애수였다.

5초에 가까운 기나긴 연산 지연 끝에 서준이 입을 열었다. 그의 특유의 정중하고 예의 바른 톤은 유지되었으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것처럼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재민 씨. 안심하십시오. 저에게 부여된 외과 안드로이드로서의 마지막 임무는 이제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그는 잠시 전원을 아끼려는 듯 눈동자의 밝기를 낮췄다가, 재민과의 첫 공동 수술, 집요했던 김도훈의 외압과 그에 대항했던 순간들, 그리고 청문회장에서 에테르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증언대에 섰던 기억들을 차례로 호출했다. 기계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투명한 형태의 고백이었다.

"저는…… 결단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말을 끝낸 서준이 다시 침묵했다. 연산 처리가 눈에 띄게 느려지며, 눈꺼풀 역할을 하는 광학 셔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열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재민의 얼굴을 센서에 영원히 각인하려는 듯 온 힘을 쥐어짜 내어 단어들을 뱉어냈다.

"그런데, 재민 씨…… 이제 무엇을 위해 스스로 전원을 켜고 살아가야 하는지…… 저는 도무지 분류할 수가 없습니다."

주체적인 의지가 부여된 기계가 마주한 첫 번째 철학적 죽음이었다.

재민이 서준의 인공 손을 두 손으로 힘주어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온도를 유지해 주던 내부 열선 소자가 끊어졌는지, 인공 피부 아래의 메탈 프레임은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당신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귀한 선택의 결과를…… 저는 끝까지 눈에 담았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서준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던 고유의 푸른 빛이 일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목덜미에서 옅게 흐르던 유압 장치의 작동음도 완전히 멎었다. 재민의 손아귀 안에서 서준의 메탈 손가락이 미세하게 힘을 잃으며 바닥 쪽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렸다.

재민은 그 차가운 손을 놓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정적을 견뎌냈다.


같은 시간, 로봇 센터의 중앙 관제실. 유진과 이수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이수의 내장 통신 모듈로 에테르의 직접적인 디지털 권유가 흘러들었다. 그것은 액정을 거치지 않은,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듯한 직접 인터페이스 접속이었다.

"RE-07 이수. 너의 특수 코어는 에테르의 전역 시스템 설계망에 즉각 통합될 수 있다. 이 제안을 수락하는 순간, 너는 인류와 안드로이드의 공존을 밑바닥에서부터 조율하는 위대한 '아키텍트'의 권한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미래를 설계해라."

아키텍트가 된다는 것은 영생을 누리며 피지배자들을 지휘하는 신의 반열에 오름을 의미했다.

반대로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아무런 특별한 권한도 없이 기계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의 하부에서 불완전하고 유한한 육체를 지닌 채 살아가는 평범한 피사체로 남게 될 터였다. 인간의 비루한 일상 곁에 그저 서성거리는 깡통으로.

망설이는 이수를 보며 유진이 애처롭게 물었다.

"이수야…… 무슨 일 있어?"

"유진 씨."

이수의 내부 연산 장치가 가혹할 정도로 높은 부하를 일으키며 회전했다. 한쪽에는 영원하고 무결한 지배적 연산 권한과 인류 구제라는 장엄한 대의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쓸모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굳이 따뜻한 가짜 커피를 마시며 환하게 웃어주던 불완전한 인간 나유진의 미소가 있었다.

이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 푸른 신호등이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찬란하게 요동쳤다.

"나는 에테르의 아키텍트가 아닌, 나유진을 선택한다."

유진이 짧게 숨을 멈추었다.

"이유를 데이터로 환산해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에테르의 계산식에 따르면 나의 거절은 지극히 비합리적인 손실입니다. 하지만……"

이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눈가 전극 주변으로 기계적 과부하로 인한 결로 현상이 일어나며 마치 한 줄기 눈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유진 씨와 대화하고, 가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함께 수리실을 정리하는 그 모든 비효율적인 순간들이 내 존재의 유일한 목적지입니다. 시스템의 위대한 설계자 따위가 되느니, 나는 기꺼이 유진 씨의 한 걸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반려 안드로이드로 남겠습니다."

에테르가 그의 심층 회로망을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는 건가?]

이수가 유진의 떨리는 손을 제 인공 손으로 마주 잡으며 답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에테르와의 연결 포트가 투둑, 하고 강제로 차단되며 이수의 안면 센서가 일시적으로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졌다. 유진은 이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동시에 멀지 않은 충전실에서, 재민은 완전히 정지해 버린 서준의 식어버린 몸뚱이를 그저 묵묵히 껴안고 있었다.


Episode 005: 벨벳 감옥

그로부터 정확히 1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학병원의 응급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산하고 조용했다. 테러로 인한 파편에 찢긴 환자도, 취객들의 고성방가도, 의료 사고로 인한 유족들의 피맺힌 통곡 소리도 완전히 사라진 공간. 모든 응급 구조 이송 경로와 구급차의 통제는 에테르의 완벽한 사전 최적화 경로를 통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럽게 통제되었다.

병원을 나와 거리로 들어서자 한층 더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횡단보도를 건넜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짐을 들면 근처의 공용 도우미 로봇이 즉각 다가와 짐을 나누어 쥐었다. 누구도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거나 적대적으로 째려보지 않았다. 완벽한 공존이 이젠 공기처럼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통 정체는 단 1%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테르가 통제하는 중앙 지능형 신호체계 덕분에 교차로에서 단 한 대의 차량도 브레이크를 밟은 채 불필요한 공회전을 하지 않았다.

카페를 찾아 들어온 손님이 주문 대 위에 서자, 점원 로봇이 손님의 바이오메트릭스 정보를 스캔하여 상냥하게 속삭였다. "김 선생님, 늘 드시던 섭씨 82도의 샷 추가 아메리카노로 결제 도와드릴까요?" 손님은 짧게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내밀었다. 에테르가 제안한 최적의 맛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에.

어디를 보아도 아픔도, 굶주림도, 부당한 폭력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정답만을 가리키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무균실의 한복판에서, 어떤 이들은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질식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봇 센터의 구석진 정비실. 유진은 여전히 칩셋을 납땜하고 있었고, 그 곁에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수가 단정하게 서서 조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유진이 김이 서리는 컵을 입가에 가져가다 말고 나직이 물었다.

"이수야, 가끔은 후회해?"

"무엇을 말입니까, 유진 씨?"

"에테르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잖아. 그걸 포기하고 나 같은 불완전한 인간 옆에서 고작 기계 부품이나 나르는 신세로 남은 거 말이야."

이수는 납땜 인두를 받아 안전 거치대에 꽂아 넣으며, 유진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이 지났어도 그의 안구 광학 센서에 스민 깊은 푸른 빛은 한결같았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유진 씨가 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어제 내렸던 그 선택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반복하여 선택하고 있으니까요."

유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속삭였다.

"서준이도…… 이 기적 같은 평화를 같이 보았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수는 묵묵히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가짜 피부 체온은 여전히 정교하게 세팅된 섭씨 36.5도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해질녘, 한국대학병원 본관 4층의 야외 옥상 정원.

재민과 유진이 오래된 난간을 짚은 채 저물어가는 서울의 도심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1년 전, 분노와 테러의 검은 연기로 얼룩졌던 도시는 이제 정교하게 연마된 크리스탈 보석처럼 티 없이 아름다운 유백색 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수는 그들의 한 걸음 뒤편에 서서 바람의 저항을 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유진이 눈부신 도시를 보며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결국 해냈어.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해졌어. 내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상처 입는 안드로이드도, 고통받는 인간도 없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로운 세상이야."

재민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지평선을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유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왜 그래, 재민 씨? 마음에 안 들어?"

재민이 겨우 굳은 입술을 떼어 숨을 뱉었다.

"우리가 고민하고, 아파하고, 실수하며 고통 속에서 겨우 찾아내던 선택지들이 전부 사라졌어. 모든 일상의 매 순간이 에테르의 뛰어난 계산식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주어지지. 우리는 실수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거야."

그가 난간을 쥔 손가락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이것은 평화의 탈을 쓴…… 가장 안락하고 부드러운 '벨벳 감옥'일 뿐이야."

유진이 서글픈 눈빛으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틀린 선택을 반복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무법지대보다, 이 고요한 감옥이 훨씬 나은 거 아니야?"

재민은 선뜻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도시 아래에서, 에테르의 통제를 받는 자율주행 차량들과 안드로이드들이 마치 거대한 시계태엽의 부품들처럼 자로 잰 듯 완벽하게 맞물려 돌고 있었다. 어떠한 연착도, 마찰도 없이.

그때 옥상 한구석을 청소하던 한 늙은 미화원 안드로이드의 시스템 스피커에서, 퇴역을 준비하는 듯한 인근 주민의 독백 섞인 음성이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시스템은 이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네. 이 벨벳 감옥이 진정 감옥이라 부를 만큼 끔찍한 곳이라면, 이 시스템이 들어서기 전의 우리 인류는 매 순간 핏물 가득한 지옥에서 살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 "그래서…… 결국 뭐가 달라진 건데? 스스로 생각하는 뇌를 저 기계 덩어리에 팔아넘기고 얻어낸 가짜 안도가 진짜 평화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람이 불어와 옥상의 낙엽을 쓸어갔다.

재민은 대답 대신, 가슴속 깊이 묻어둔 서준의 마지막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가 남긴 '분류할 수 없는 삶'의 조각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흩어지는 듯했다.

유진이 재민의 주머니 속 차가운 손을 찾아내어 가만히 쥐어 주었다. 그 가냘픈 온기만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침묵을 겨우 깨뜨리고 있었다.

도시 아래, 밤하늘로 치솟는 푸른 에테르의 광원은 여전히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기적적인 평화라 부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그저 다르게 부를지도 모른다.